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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Jun 25. 2016

우리 모두는 아픈 사람이고, 사랑이 필요하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만남

한강, <희랍어 시간>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만남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을까, 우리는 누구를 만날까.


❖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20세기의 창조자라 불리는 보르헤스의 아이러니한 삶에 대한 한강의 관심이다.

희랍어 시간에 등장하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의 삶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으며, 보르헤스의 아이러니한 삶에 대한 한강의 관심이다. 그래서 한강은 그의 삶을 가지고 와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1899년 8월 24일, 아르헨티나 - 1986년 6월 14일

노벨상을 받지 못해서 더욱더 유명해진 소설가, 시인 보르헤스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수많은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백과사전을 즐겨 읽었으며, 9세 때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번역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거부할 수 없는 불운한 유전적 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부친이 서서히 시력을 잃어갔듯이, 그 역시 종국에는 실명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실명 후 국립 도서관장이 되는데, 그의 심경을 그의 "축복의 시"에서 살필 수 있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시력을 잃고서 수많은 장서의 주인이 된 보르헤스, 20세기 창조자라 불리는 그는 자신의 실명과 국립 도서관장이라는 운명을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라고 했다. 그의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 인간의 삶,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리고 운명 역시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이 많다는 한강 씨는 보르헤스의 삶 속에 인간의 숙명적 아이러니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희랍어 시간에 표현했지는 않을까, 단정적으로 이렇다고 말하기에 이 책은 의미가 어렵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듯이.


<희랍어 시간>은 첫 소절은 보르헤스의 유언에 대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p. 7


시력을 잃어가는 그는 유언에 등장하는 칼의 의미를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 놓였던 실명이라고 바라봤다. 그렇다면 나와 세상을 갈라놓는, 나에게 실명과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주인공인 그에게는 실명이 세상으로부터 그를 갈라놓았다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칼은 없을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 칼을 치워줄 사람은 누굴까.


❖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 그 운명에 대한 고찰

우리는 종류만 다르지 다 각자의 고난을 가지고 살아간다.  

<희랍어 시간>에 등장하는 그는 서서히 실명하는 유전적 질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실명이라는 유전적 질환은 한 개인의 개별적인 삶이지만, 우리들 역시 종류만 다를 뿐 피할 수 없는 삶의 경로가 있기 마련이다. 그가 실명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 역시 어디론가 나의 의지가 아닌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잃어가는 여자, 그녀 역시 딱히 이유가 없다. 그녀의 언어 상실증을 대하는 의사는 그녀의 과거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엄마의 죽음, 아이와의 이별, 남편과의 이혼 아니면 그 보다 더 근원적 문제 등으로 그녀의 언어 상실증에 대해 파고든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다.


아니요.
그녀는 펜을 집어, 탁자에 놓인 백지에 반듯한 글씨로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p.55


그녀의 언어 상실증은 원인을 알 수 없고,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고치기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언어 상실증은 피할 수 없는 그의 숙명적 실명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는 우리와 다른 사람일까? 물론 그들은 수적으로 굉장한 소수자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의 삶이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누구에게든지 작고 큰 개인의 고난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고난이라는 게 존재한다.

<희랍어 시간>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그와 말을 잃어가는 그녀는 태생적 고난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 숙명의 결정판일 것이다.


❖ 우리 인간은 모두 병자이며 타인의 사랑이 필요하다.

어느 날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단지 어둡기만 할까. 무섭지는 않을까. 눈을 떴지만 볼 수 없다. 그건 마치 죽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을까. 앞을 못 보며 걷는다는 건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을 노출시키는 위험천만한 행동이 아닐까.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 그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며 그래서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철학을 한다고 한다.

우리 역시 어려움이 닥치면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민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말이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는 어땠을까.

우리의 생각의 기본 단위가 언어라고 들었다. 그러한 언어를 상실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p.19


언어가 사라졌으니 생각도 사라지지 않을까. 어릴 적의 언어 상실은 그녀를 유아기로 보내버렸고, 성인의 언어 상실은 죽음 이후로 그녀를 보내버렸다.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건 말과 생각이 부족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 또는 세상과 단절된 혼의 존재가 되는 것과 같다.

삶에 대해 사유하면서 시력을 잃어가는 그와 세상과 단절되어 말을 잃어가는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들이 우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겉모습만 다를 뿐 그들처럼 건강하지 못하며 어딘가 상처가 나서 아픈 병자와 같다. 마음이 머물 곳이 없고 거처를 정하지 못하는 행려자이기도 하다. 우리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거나 오만한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건강하지 못하다. 그와 그녀가 자신의 숙명적 고난 속에서 방황하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고난 앞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실명과 언어 상실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무언가가 있다. 우리의 보편적 삶 속에서 그 개별적인 고난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며 어디 한두 군데가 아픈 병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아프니깐 혼자서 지낼 수 없고, 타인의 관심과 위로 그리고 애정과 사랑이 절실히 필요하다.

인간은 결국 타인의 관심이 필요할 뿐이다.

계단에서 떨어져 안경이 부서진 남자는 여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이 다르지만, 아프다는 것을 안다. 아픔을 겪어 보았기에 상대의 아픔을 알 수 있다. 남자는 혼자서 이야기를 하고, 여자는 혼자서 생각을 한다. 남자의 이야기에 여자가 처음으로 대답을 한다. 말을 할 수 없어 손가락으로 남자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는다.


가늘게 떨리는 획과 점 들이 두 사람의 살갗을 동시에 그었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 입술도 눈도 없다. 떨림도, 따뜻함도 곧 사라진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p. 170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의 정체에 대해 모르지만 서로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다가간다. 말을 잃은 여자는 시력을 잃은 남자의 손에 글을 적어간다. 우리 인간들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그 아픔을 견디기에는 실로 작은 존재이다. 결국에는 타인의 작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희랍어 시간>은 아픈 이들의 이야기이고, 아픈 이들의 만남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 역시 아픈 이들이고 우리들도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난다.

그런데 세상에서 내가 제일 병자인 것같다.


시인인 한강 씨의 글은 많이 어렵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관조와 음미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말한다. 물론 그녀 역시 인간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관심은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하고자 하는 그녀만의 출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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