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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Oct 14. 2016

행복이란 불행의 시작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비이성적인 판단과 용서가 필요하다.

윌리엄 폴 영 <오두막>


우리의 이성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불행의 원인을 안다면 그걸 이성적으로 해결하고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신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비이성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것들 모두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위는 아닌 것 같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인간의 이성은 거부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할 운명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성이 가지는 본성 때문에 해결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것이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절대 답을 구할 수가 없다.

본성에 따라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우주를 탐험하지만 결코 답을 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이성은 한계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면 논리와 이치에서 벗어나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고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사랑과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 도슨과 로즈의 불멸의 사랑을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걸 이해하고 그들의 숭고함과 열정을 누구나 감히 흉내 낼 수 있을까? 우리의 지평으로는 삶과 죽음, 우주의 신비는 물론이고 내 주변 사람들의 헌신과 사랑마저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성을 뛰어넘는 일. 그리하여 사랑이나 신앙은 그런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 우리의 불행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도처에서 부지불식간에 발생한다. 특히 불행은 더욱더 그렇다. 불운은 예기치 못한 아니 원치 않는 손님이니깐 말이다.

그런데 불행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아마도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유지되어온 나의 일상이 흔들리고 나의 평온함이 깨지는 순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게 일상의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바로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불행해진 주인공 맥이 하나님을 만나고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불행의 늪에서 나와 행복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행복해지는 건 나를 찾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맥은 따뜻한 불길에 매료되어 기도를, 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받아왔다. 아니, '너무 많이 축복받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그는 만족했고,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p.57


어느 날 맥에게 불운이 닥친다. 캠핑장에서 막내딸 미시가 사라진 것이다. 경찰과 사람들이 동원되어 찾아보지만 상황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꼬마숙녀 납치범으로 알려진 살인마의 소행으로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끝내 찾은 건 미시의 죽음을 알 수 있는 오두막에서의 흔적 밖엔 없었다. 행복한 가정에 들이닥친 불운, 과연 이걸 설명해줄 사람이 있을까. 이걸 신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막내딸 미시의 실종은 맥을 흔들어놓았다. 맥은 딸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그 자신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맥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파파-


자신을 잃어버린 맥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막내딸의 실종과 죽음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 들이닥친 불운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상황을 미연에 막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살인범 역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매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파파- p.22


도대체 누가 보낸 편지일까?

자신의 어린 막내딸을 살해한 범인일까, 그렇게 불러도 대답 없던 하나님일까, 이성적인 사고로는 누가 보낸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은 거부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할 운명이기에, 맥은 그 편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한다. 그의 이성으로는 편지의 출처를 가늠할 수도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오두막으로 향한다.

신을 만난다는 건, 이성의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거나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때가...


 행복이란 불행의 시작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맥은 오두막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딸아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곳, 그렇기에 상처로 얼룩져있는 그곳, 바로 자신의 상처로 스스로 지은 집, 오두막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하나님은 달랐다. 성경 속의 하나님은 맞지만 우리가 규정해 놓은 신은 아니었다.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말 그대로의 신의 모습이었다.  

그 하나님은 맥을 사랑하였다. 맥에게 불운이 닥친 것에 가슴 아파하면서 맥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했다. 신이기에 맥의 불운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맥을 사랑하지 않는 게 절대 아니었다.

맥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서서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맥 자신과 미시의 행복을 얼마나 원하는지 알게 된다.

미국 흑인교회 총기사건, 유가족은 살인범을 용서한다.

맥은 행복해지기 위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야 했다. 불행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금 행복해져야 했다. 그런 그에게는 하나님은 "용서"라는 방향을 알려준다. 막내딸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범을, 딸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용서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을 그리고 살인범을 용서하게 된다.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 지금껏 그 사람이 네가 괴로워하고 고통당했는지 신경이라도 썼을까? 오히려 고소해하면서 잘 살아갔겠지. 그걸 끊어버리고 싶지 않아? 너는 그 사람이 알게 모르게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게 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의미야." p.371


맥이 살인범을 용서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고서는 결코 맥은 하나님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하나님은 맥이 행복해지기 원했다. 행복해지려면 과거에 묶여있어서는 불가능하였고, 그 과거로부터 멋어나기 위해서는 용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용서란 결코 살인범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서 맥은 용서를 해야만 했고, 그 용서를 통해서 맥은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행복이란 불행의 시작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이건 종교소설이다. 우리 사회에 반기독교적 분위기가 꽤나 심하여 조심스럽다. 그 이유야 교회 안팎으로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읽으면 어떨까 한다. 소설이니깐. 그리고 해리포터를 읽으면서 놓았던 이성의 끈을 여기서도 놓고 읽으면 어떨까. 신을 만난다는 건 절대 이성적인 현상이 아니기때문이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 이성의 눈으로 읽지 말고 우리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읽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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