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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Jun 16. 2017

당신의 욕구는 안녕하신가요?

욕구가 억제된 인간의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저는 딸아이한테 '식사시간에는 일어나면 안 된다. 식탁에 장난감을 가지고 오면 안 된다, '고 늘 말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도 모르게 너무 재미있는 책이 있어서 아침을 먹으며 몇 줄 읽었습니다. 아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절 보며 한마디 하더군요.


"아빠는 왜 밥 먹으면서 다른 거 해요?"


"....."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책을 덮어야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요즘 부쩍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생각을 하고 그걸 말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때로는 위의 대화처럼 저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하지 않던 떼를 쓰거나 고집을 피우기도 합니다. 가끔은 회식 때문에 늦는다고 하면 어디를 가느냐, 누구를 만냐느냐 등과 같은 추궁을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고분고분하지 않고,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이런 아이의 변화하는 모습에 당황한 우리들은 이 나이쯤을 가리켜 미운 6세니 미운 8세니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아주 당연한 과정입니다.

제 딸아이에게 드디어 "자아"라는 인식이 급성장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아이의 행동이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주변 육아 선배들과 제 경험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모습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저의 분신이 아닌 아이 그 자체의 독립된 인간이니깐요. 그런데 제가 읽은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의 "요조"는 그렇지 못합니다. 요조에게는 "자아"가 잘 안 보입니다. 그것은 요조, 스스로가 자신의 색깔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욕구가 억제된 인간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초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p.17


"요조"는 인간을 두려워합니다. 한강,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아버지의 폭력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요조 역시 아버지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대상이 한 개인에서 인간 전체로 확장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에 있듯이, 요조는 두려움의 대상인 인간과의 관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그것을 익살로 대신합니다. 그 익살은 늘 칭찬으로 되돌아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요? 아주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이 대목에서 인간은 바로 "욕망의 덩어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우리 인간은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가 생태피라미드에서 포식자로서 위치하다 보니 가끔 착각을 할 뿐이지요. 그런데 욕망이라고 하니깐 너무도 날것의 느낌이 납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욕구일 겁니다. 욕망이 아닌 욕구는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부터 시작하여 내가 살고 싶은 인생, 내가 되고 싶은 인생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욕구가 아닐까요?

그런데 요조는 이런 욕구가 꺾여버리고 그것을 숨기게 됩니다. 그저 익살로 무장하여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진짜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타인이 무섭기 때문에 타인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 자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춰야 하는 거지요.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나 보다 하고 마음을 놓으려던 참에 저는 실로 불의에 등 뒤에서 칼을 맞았습니다. p.31


중학교에 올라간 요조는 더 능청스러운 익살로 자신의 자아를 숨깁니다. 그런데 급우인 다케이치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부러 그랬지?"라고 묻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드러난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웠을까요? 칼에 맞은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요조는 더욱더 자신의 숨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또한 더욱더 타인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인간실격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p131


결국 요조는 그렇게 인간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요조가 그렇게 된 것의 원인은 미루어 짐작만 할 뿐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원인 역시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타인에 대한 공포이냐 자존감의 부재이냐 그것도 아니면 타인의 무관심이냐 등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구가 꺾이거나 지배당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힘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 요조와 우리

요조는 타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타인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조종을 당합니다. 욕구를 지배당하는 거지요. 그것은 곧 습관이 되어 요자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조의 욕구는 타인에 따라 다르게 분출됩니다. 바로 힘의 논리인데요. 상대가 남성일 경우, 요조는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제어하게 됩니다. 반면에 힘의 논리가 덜 적용되는 여성에게는 욕구가 제어된다기보다 그것이 욕정으로 다르게 표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조의 여성편력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억제된 욕구는 어떻게든지 분출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래서 요조는 담배, 술, 섹스 그리고 모르핀 중독으로 억눌린 욕구가 드러난 건 아닐까요?

요조의 욕구가 한 개인에게 출발하여 인간 전체로 확장되어 억압되었다면 현대의 우리의 욕구는 거대한 사회제도, 국가 집단으로 시작하여 종국에는 개인의 권력자들에 의해 좌절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우리의 욕구를 좌절시키는 대상은 수없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 무소불위의 대상은 우리에게 욕구의 실현보다는 복종을 원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하기보다는 학교 평가에 맞춰서 학생들 대하고, 사회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요구 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노예처럼 끌려갑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형성된 가정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의 길, 기득권이 되는 것,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가는 것만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요조와 같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아이들뿐이겠습니까? 요조는 대한민국 어딜 가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한민국에만 있을까요?

욕구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자살률 OECD 1위, 하루 평균 약 40명 자살이라는 숫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인간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삶을 버립니다.

우리는 절대 요조와 같이는 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자격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고 표현해야 합니다. 또한 개인의 욕구를 무시하거나 제어해서도 안 됩니다. 욕구는 자아를 실현시켜주고 그건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 공유된 생각의 개별성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에 있지만 그 인간은 지극히 그 개인 안에만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실격>은 1948년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한 개인이 자신의 욕구가 억압된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자신의 투영체인 요조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 개인의 존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의 작품은 일본 패망 직후 분위기와 맞물려 많은 젊은이에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 민족은 35년간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철저하게 묵살당하며 무참하게 유린당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요조는 한 개인의 인간실격이었고, 그의 작품을 탐독한 이들 역시 개인의 아픔을 느낀었었지, 그것이 바다 건너 다른 민족에게 까지는 투영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느끼지만 상대의 것은 외면하고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중요한 만큼 상대도 중요한 건데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상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또한 인정해야지요. 이 책 하나 가지고 너네는 타인에게 욕구가 무시당한 걸 공감했으면서, 너네들의 무력 앞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유린당한 우리에 대해 항변해 보았자 큰 효과가 없을듯합니다. 우리도 인간이니깐요. 아무리 생각과 슬픔이 공유되더라도 그것들은 한 개개인 안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니깐요.

너무 멀리까지 갔습니다. 아는 게 없다 보니 중언부언에 주저리주저리 했습니다. 돌아올 자신도 정리할 용기도 더 안 나서 그만 씁니다.


이 글을 다 쓰기 전에 딸아이와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한다고 했는데 어렵습니다. 그래도 노력합니다. 아빠인 저에게 맞춰서 원숭이 같이 살지 말라고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저의 생각마저 강요하는 건 저의 욕심이고 딸아이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겠지요? 조용히 지켜보아야겠습니다.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꾸 간섭하고 지적하려고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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