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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Oct 11. 2015

비공감능력의 상실

죽음에 대해선 더 이상 예전만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기와 수필사이>

  "넌 공감이 안되제?"

  24년 지기 친구에게 자주 듣던 말이었다. 이젠 뭐 들을 일도 없지만.


  난 타고난 비공감능력자다. 그 능력을 타고난 건지 아님 습득한 건지는 모르지만 웬만해선 타인과 공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래포(Rapport)까지는 아니라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는 끄덕거려야 하는데 그마저도 힘들다. 아마 김태희가 옆에서 울고 있어도 눈길 한번 안 줄 자신이 있다. 하지만 김태희가 노골적으로 유혹한다면 그건 성격이 다르니 넘어가고 누군가 아사직전에 있다면 그것 또한 넘어가자.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옆에서 누군가 울고 있을 때 같이 슬퍼하는 능력이 제로(0)에 가깝다는 것이다.

  내가 그걸 무의식으로 느낀 게 17살 때쯤이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도 그랬었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 난 외갓집에서 모든 사랑을 다 받고 자랐다. 바로 아래 이종사촌과 11살 차이가 나다 보니 나의 독주는 조용필의 전곡 가요톱텐 1위 보다 몇 곱절은 길었다. 그리고 난 유일한 남자 아이였다. 특히 외할머니는 남자인 나를 무척 예뻐했다. 지금이야 배 나온 삼십 대 아저씨지만 어릴 때는 남들에게 여자로 오인받을 만큼 예뻤으니 가족이야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릴 적엔 집으로 여학생 20명 정도가 날 보러 찾아오기도 했었다. 누구에게나 있는 추억거리는 아니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안타깝기만 하다. 다 짜버린 치약처럼 더 이상의 미모는 남아있지 않으니.

  그러던 외할머니께서 어느 겨울부터 아프셨다. 난 가끔 외할머니를 택시로 모시고 병원을 다니기도 했고 외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운동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받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외할머니를 무척 따르고 사랑했었다.

  토요일인가, 한 낮에 외할머니 집을 간 적이 있다. 어머니의 부탁이었는지 아님 갑자기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여하튼 그렇게 외할머니 집을 갔는데 문이 열어있었다. "할머니, 나 왔어. 뭐해? 자?" 연신 외할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주 조용했다. 현관에 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안방이 보이는데 불이 꺼져있었다.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난 조용히 문을 닫고 그 곳을 외면한 채 뒤돌아나왔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쯤 어머니로부터 외할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다시 돌아간 외할머니 집은 낮과는 달리 안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삼촌, 이모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안방에 들어가니 외할머니가 바르게 누워계셨다. 외할머니를 보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린 마음에 당황했다. 다들 울고 있는데 나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눈치 보며 있다가 잠시나마 겨우 울 수 있었다. 어머니, 이모, 삼촌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외할머니와의 이별이 그렇게 가슴 아프지 않았다. 어렸으니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기엔  부끄러운 나이, 지학(志學)을 넘겼을 때의 일이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기 직전에 아버지로부터 친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상주는 아니었지만 장손이라 빈소를 지켰다. 친할머니 손에 자랐던 고종사촌 숙이가 며칠을 울었다. 그때도 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친할머니를 화장하는 순간 숙이는 통곡을 하였다.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래, 넌 할머니와 추억이 많았지. 힘들겠구나.'하고 울어주었다. 그나마 영정사진을 들고 출발하는 순간 그 엄숙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지만 죽음이라는 것, 이별이라는 것이 슬퍼 주먹으로 가슴을 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비공감능력자에게도 아내 일은 달랐다. 글로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아프고 아팠다. 아프다는 말 말고 표현할 단어가 딱히 없다. 그냥 아팠다. 눈물은 끝도 없이 났고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엔 탈이 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근황을 묻거나 그때의 일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내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에서 예전 나의 모습을 보았다. 내 슬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로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어차피 말하면 나만 울테고 바보는 될 수 없으니깐.

  이렇듯 비공감능력자인 난 내 일을 제외하곤 같이 울어본 적이 없다. 그랬는데 어젠 달랐다. 주말이라 오래간만에 아이와 인형극을 보러 갔다. <효성스러운 호랑이> 내용은 대충 기억이 났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재미있겠지 아이가 좋아하겠지 무책임하게 아이와 보러 갔다. 만두를 맛있게 나눠먹고 연극 시작 전에 아이와 셀카도 찍었다. 아이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순간 순간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교차로 엄습했지만 잘 참아 낼 수 있었다. 비 온 뒤 땅은 굳어지기 때문이다.

  연극이 절정을 향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물동을 들고 가던 어머니가 쓰러지고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아들과 호랑이 그리고 호랑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빠, 나 슬퍼. 이런 거 보기 싫어."

  극장 안에서 내 아이 혼자만 울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니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꼭 안아주었다. 극장에 불이 켜지고 녀석을 안고 나왔다. 그리고 복도 의자에 잠깐 아이와 앉았다.

  "많이 슬퍼?"

  "아빠, 나 죽기 싫어. 죽으면 아빠 못 보잖아. 그리고 시집도 가기 싫어. 나 시집 가면 아빠 늙어서 죽을 거잖아. 그러면 아빠 못 보잖아. 할아버지는 과일 많이 안 드시고, 할머니는 운동 많이 안 하시고 나 슬퍼."

  가끔 시집 안 간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더워 죽겠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이는 "죽겠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아무도 그 말을 쓰지 않는다. 아이가 싫어하기도 하지만 우리도 그 말을 싫어한다. 천국에서 만날 거라고 그건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의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난 극장 복도에서 아이를 안고 울어버렸다. 괜찮다고 아빠가 옆에 있을 거라고 아주 오래 오래 살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넌 아주 건강할 거라고 내가 그렇게 기도한단다고 말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눈가가 뜨거워졌고 가슴이 그 보다 더 뜨겁게 아팠다.

  난 여전히 비공감능력자이지만 사람의 죽음에 대해선 더 이상 예전만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 아이의 일이라서 그랬을까? 아이가 나와의 이별을 무서워하듯 나 또한 아내와의 이별을  무서워했기에 그 공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공감할 수 있었다. 한참을 울어야 했지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한편으로 녀석이 얼마나 무서울까 걱정이 되었다.

  만약 그때 아이가 아내에게 "엄마, 죽지 마. 무서워."라고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내는 아이가 너무 어려 그런 말을 듣지 못한 게 다행이었을까?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아주 힘든 시절에 히죽히죽 웃으며 나에게 농담을 했던 걸 보면 말이다. 나의 슬픔을 그들이 공감하기에 벽이 너무 높았을 수도 있다. 경험해 보지 못한 걸 공감하는 게 어쩌면 가식일 수도 있으니깐. 아니면 눈치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치 없는 인간들이 참 많다. 24년 지기 내 친구도 포함시켜야 된다. 날 뭐라 할 게 아니라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다 보니 결국 비공감능력이 120% 회복이 되었다. 이걸 힐링이라고 해도 될까? 시간이 1:40am이다. 몸을 망치기 전에 자야겠다. 하루키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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