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필립스 <조커> 단평 : 과잉된 과소

광기는 가득한데, 무엇을 위한 광기인가

by 성상민

<행오버> 시리즈의 연출/각본/제작을 맡으며 유명해진 토드 필립스의 신작입니다. DC코믹스 빌런 중에선 ‘렉스 루터’와 함께 유명할 ‘조커’의 프리퀄이고요. 하지만 <킬링 조크> 등의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난 조커의 (파편화된) 과거와는 또 다릅니다. 이미 감독이 여러 번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이 작품은 DC코믹스 ‘원작’에서는 ‘영향’을 받았어도 DC유니버스하고도 다르고, 굳이 그 길을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조커’를 1980년대라는 구체적인 시기의 액자 속 인물로 설정하고, 다시 2019년에 끌고 오는 작업을 거친 겁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맡은 ‘조커’(또는 ‘아서 플렉’)는 ‘화이트 트래시’의 초상입니다. 빈민에, 직장도 변변치 않으며, 거동이 불편한 노모와 함께 살며 일상은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와중에 정신 질환은 점점 악화되는데, 공공 지원은 점점 줄어갑니다.


이런 백인-빈민층의 인물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죠. <조커>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을 여러 시퀀스로 드러내는 <택시 드라이버>나 가장 최근 두각을 드러낸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 역시 여러모로 출구가 안 보이는 상황에 놓인 백인-빈민의 위치를 드러내려 애썼습니다.

이들 작품과 <조커>가 차이가 있다면, 상황 자체를 제시했던 이전의 동종 작품과 달리 <조커>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상을 제시하려 애쓴다는 겁니다. 혼란이라는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그 혼란에 ‘탈출구’라는 표어를 내거는 셈입니다. 일각의 이야기처럼 시간이 지날 수록 악화되는 주변 환경을 굳이 ‘작위적’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픽션은 결국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흘러가는 표현물이니까요. 하지만 감독은 여기에 더욱 욕심을 내어, 자신이 드러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선언을 하려드는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행오버>나 <듀데이트>, <프로젝트X> 같이 토드 필립스가 이전에 연출하거나 제작한 코미디 작품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장르가 다를 뿐, 불안정하고 막나가는 모습들을 마구 제시한 뒤- 수습을 하려다 ‘포기’하는 순간에서 나오는 기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차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허나 이전까지의 작품은 ‘코미디’에 기대하는 장르적 요소로서 처리할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은 그 ‘수습 불가능한 상황’을 사회의 ‘속살’ 마냥 보이고 싶어하는 겁니다. 야심만이 무척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야심만 높고 광기를 더욱 높이는 것에는 충실하지만, 정작 그 과잉된 양상을 들춰내면 모두 과소할 따름입니다. 다층적인 위치와 정체성에 놓인 인물들의 군상을 보여주려 했던 <쓰리 빌보드>은 물론 <택시 드라이버>나 <람보> 1편에 비교해도 광기의 속내는 무척이나 얇디 얇습니다. 대신 그 얇은 시선을 과잉된 폭력과 신경질적 분위기로 대체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뼈대가 부실한 상황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꽤나 격정적인 연기를 하여도 결국 뿌리를 제대로 심어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이 작품을 둘러싸고 나오는 온갖 말들과 과도한 자기 인정 욕구, 베니스영화제의 행보 등등이 진정한 블랙 코미디가 아닐지.

추신 1. 영상물등급위원회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줬죠. 이번 정권의 영등위가 등급을 무척이나 후하게 주는 경향이 있지만, 이건 좀 심합니다. 그냥 등급 유하게 주는 게 나아지는 길이 아니라, 제대로 기준과 원칙이나 세우길. (그리고 엿가락 같은 제한관람가나 어떻게 하길.)

추신 2. 이래저래 호아킨 피닉스는 신경증-백인-남성 캐릭터의 표상이 된 것 같아요. PTA의 <마스터>가 그랬고,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도 그랬고. 감독이나 작품에 따라 드러내는 양상은 제각기지만, 여러 모로 흥미로운 필모그래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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