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의 구조를 향한 명민한 접근, 그러나 재현에 대한 고민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7년 1월, LG그룹의 명목적으로는 ’방계그룹‘, 실질적으로는 ’위장 자회사‘인 LB휴넷 전주 콜센터의 LG유플러스 해지방어팀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 애견학과 재학생 홍수연 씨가 저수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홍수연 씨의 부모님은 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지역 내의 다양한 운동 단체, 노동조합이나 노동안전단체, 국회 등을 찾아가며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 LB휴넷이 평소에도 홍수연 씨를 비롯해 인건비 절감 목적으로 현장실습생을 위주로 콜센터를 운영했으며, 지속적으로 실적에 대한 압박을 가했고, 근로계약서도 이중으로 작성했으며, 인센티브는커녕 야근 수당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의 실태가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이 센터는 지난 2014년 악성 민원인의 말도 안되는 요구로 팀장이 해직되자 스스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한 곳이었습니다.
<도희야>로 처음 장편을 발표한 정주리 감독의 신작 <다음 소희>는 이 2017년 1월에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2014년에 같은 센터에서 발생한 사건, 현장실습 청소년이 놓인 실태 등을 함께 극화한 작품입니다. 회사명은 LG유플러스에서 (통신사 이름을 모두 섞은) ‘한국통신S플러스’가 되었지만 특성화고 애견학과에서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가게 된 것, 그곳에서 청소년이 겪은 무수한 노동 문제,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모습은 모두 실제 사건의 내용에서 상당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작품은 주인공 ‘김소희‘(김시은) 주변의 인물, 그리고 그를 감싸는 상황과 구조를 통해 이 비극이 단지 한 사람에게만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며 책임을 지어야 할 자 역시 하나가 아님을 넌지시 비춰냅니다.
그 접근의 방식은 크게 두 개의 파트이죠. 하나는 일반적인 극처럼 실제로는 그렇게 볼 수 없는- ‘전지적 3인칭’의 시점으로 한 개인에게 닥친 구조적인 비극을 시배열로 관객에게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형사 ‘유진’(배두나)를 통해서 사건이 벌어진 이후 최대한 어떻게든 이 비극을 만든 ‘지옥도‘를 정밀하게 완성하는 일종의 ’조각 맞추기‘입니다.
실제 사건을 안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관에 들어가거나 VOD로 작품의 1부를 본 사람이라면 이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불안정 노동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명목일 뿐 인력소개소로 전락한 특성화고, 그리고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나 예방조치도 없는 행정이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양산하다 한 목숨이 사라지는 것에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사건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극에서만 가능한- 일종의 신이 되어 모든 맥락을 단숨에 파악하니 바로 결론을 낸 내용입니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무수한 노동 문제가 터져도 개선은커녕 개악이 되기 쉽듯이, 영화는 2부의 모습을 통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청소년/청년과 노동의 착취외 소모 구조를 최대한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의 자취를 그려냅니다.
그러기에 극중 ‘유진’은 배역은 ‘경찰’이어도, (이 영화를 본 수원 은하종합건설 산재피해 유가족 김도현 님의 소감대로) ’실제 존재하는 경찰‘ 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경찰이 한 청소년의 죽음에 노동과 사회와 교육의 문제를 모두 잇기 위해 경찰 인력까지 동원해 부딪칠 수 있을까요. 어떤 점에서는 ‘경찰’이라는 설정은 극중에서 원활히 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일 뿐, 실질적으로 유진의 역할은 ‘주시자’이자 ‘대변자‘입니다. 문제 의식을 가진 유가족, 활동가, 또는 감독, 관객의 시선을 대리하여 ‘왜’ 누구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지, ‘어찌하여’ 이 문제가 구조적으로 반복되는지를 유진의 대사와 행동으로 대신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진의 모습이 바로 영화의 핵심입니다. 동시에 유진은 어찌보면 소희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성장했을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쉽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불의라 말하며,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각종 불이익에도 시달리죠. 소희를 비롯한 극중의 청소년들은 ‘국제노총 노동권 지수 최하위 5등급’이라는 한국의 처참한 노동권으로 한 번, 어리다는 이유로 또 한 번 이중의 압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이중의 압박은 유진에게도 비슷하게 이어짐이 은연 중에 드러나죠.
나이와 직업은 달라도, 소희와 유진은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유진은 ’생존자‘로서 공감하고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역설적으로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김도현 님의 지적처럼 (https://www.facebook.com/100003199142294/posts/5822592534523994/?mibextid=ykz3hl)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건 한 명의 의로운 경찰이 아니라, 유가족과 이에 동참한 사회운동 활동가였으니까요.
물론 극은 현실과 꼭 닮을 수 없고, 소희와 유진을 1부와 2부의 핵심 캐릭터로 배치시키는 서사적 선택은 제작진이 생각한 분명한 의도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현’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 둘(또는 셋)만이 그나마 주체적으러 움직이려 할 뿐, 나머지는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분명 처참한 한국의 현실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는 효과적이지만 다시 한 편으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제기되어, 어떠한 움직임으로 이으려 나갔는지를 보여줬는지는 장르의 연출 상으로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것이 있으니까요.
이미 정주리 감독은 이전 배두나와 함께한 데뷔작 <도희야>를 통해서 ‘갇힌 사회’의 순환하며 여성-청소년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개인을 압박하는 구조의 상을 인상적으로 그렸고, 그 기법은 마을 하나보다는 넓지만 여전히 ‘갇힌’ 한국 사회를 말하는 이번 <다음 소희>에서도 분명 효과적으로 발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접근이 가질 수 있는,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배어나올 수 있는 파급을 고민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분명 준수하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많은 생각을 낳으며 작품을 관람한 뒤 후속적인 움직임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극중 ‘유진’처럼 이 ‘구조’의 상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차원에서 이 영화와 함께 현장실습 청소년의 실태를 르포의 차원에서 접근한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홍수연 님의 부모님을 비롯해 여러 산재 피해 유가족들이 함께 하는 모임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 그리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같은 관련 단체/노조에 대한 관심을 병행하는 것을 이 단평의 말미에 함께 추천드립니다. 분명히 극 이후의 ‘유진’도 자신이 한때 스쳐 지나간 아이의 죽음을 쉽게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계속 실천하며 움직였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