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되며 더욱 직설적인 재해에 대한 진혼, 그러나 변주되지 않은 지점.
이래저래 신카이 마코토의 20년 가까운 필모그래피를 말함에 있어, 2013년작 <언어의 정원>는 하나의 기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판타지가 아닌 계열에 속하는 동시에, 이름대로 ‘언어’, 그러나 직접 발화하는 언어만이 아니라 직접 드러나지 않아도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는 언어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분명 전해질 수 있음을 드러냄을 말했습니다. 그 작품 이후로 2016년 <너의 이름은.>, 2019년 <날씨의 아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작년- 한국에서는 올해 개봉하는 <스즈메의 문단속> 이라는 일종의 3부작으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 전 <별의 목소리>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등 소위 ’세카이계‘(セカイ界, 용법은 조금씩 다르나 대개 ‘두 남녀의 힘으로 거대한 세계를 상대하는 플롯’의 이야기를 통칭)로 분유되었던 작품과 일견 비슷해보이지만 직접적으로 현실의 공간과 시간, 사건을 소환하며 두 명의 주인공 외에도 적극적으로 타인을 소환하고 있어요. 명백히 판타지적 요소가 첨가되어 있지만, 합리로 형용할 수 없는 현상과 인연은 사실 시공간의 안에서 일정한 구조로 묶여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근래 작품들은 <언어의 정원>의 변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장 최신의 변주인 <스즈메의 문단속>은 가장 <언어의 정원>과 닮아 있고, 다시 그간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이루던 판타지의 결과는 많이 다른 노선을 택합니다.
물론 특유의 색채와 광원 표현은 계속 나날이 극치를 찍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색감이 될 정도인 푸르고 청량한 색채의 선택은 그 반대로 재해를 상징하는 검붉음과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포인트를 주고, 다시 더욱 역동적인 동세의 표현은 이 비현실적으로 물드는 색감에 하나의 리얼리티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분명 서사의 전개나 캐릭터의 묘사는 이전과 달라지는 길을 갑니다.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소타’(마츠무라 호쿠토)는 얼핏 보면 2010년대 이전의 신카이 마코토를 생각나게 하는 비현실적 설정입니다. 일본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막기 위해 곳곳, 주로 폐허에서 나타나는 ‘문’을 막는게 사명인데, 그 역할이 대대로 이어지는 일이라니요.
그러나 곧바로 소타는 채 작품의 절반을 넘기도 전에 제대로 된 움직임이 어려운 상태가 되고, 큰 역할은 이 영화의 제목을 장식한 주인공 ‘스즈메’(하라 나노카)에게 이어집니다. 큐슈 지역 미야자키현에 이모 ‘타마키(후카츠 에리)와 둘이 사는 스즈메는 등교길 우연히 만난 소타를 보고 뭔가 마음이 끌리고, 우여곡절 끝에 소타의 ‘재앙의 문 닫기‘를 직접 보게되며 예기치 않은 여정이 시작되죠.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의 남쪽 멀리에서 홋카이도를 제외한 북쪽 멀리까지 이어지는 여정, 그리고 중간중간에 경유하는 공간의 설정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쉽게 재해에 노출되기 쉽거나, 또는 결국 실제로도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중인 재해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죠. 설사 직접적인 지진은 아니어도, 급변하는 사회 상황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는 것도 사회적 재해라면 재해일 것입니다.
이러한 재해의 은유는 바로 이전의 두 작품에도 있었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더욱 직접적으로 공간과 시기의 명칭을 꺼내며 보다 직설적인 어법을 취합니다. 게다가 이전 작에서는 막판이 되어서야 겨우 주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던 여정도, 이 작품에서는 스즈메와 소타가 오가는 곳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소중한 동료가 되어줍니다. 심지어 제대로 이름도 없지만, 자신이 의도하든 아니든 SNS를 통하여 목표의 행방을 중계하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까지 예기치 않은 동료가 됩니다. 거대한 재해를 두 명의 남녀 주인공이 막는다는 점에서는 소위 ’세카이계‘로 일컬어지는 작품과 궤를 같이 하지만, 그 둘의 옆에는 곳곳에서 만난 ‘동반자’들이 함께하는 셈입니다.
왜 연출자는 이러한 변주를 준 것일까요. 그것은 어쩌면 이 작품 중에서 여러 단서로 드러내는, 2010년대 이후 다수의 작품에 큰 영향을 준 2011년 3.11 대지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언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의 이름은.>이 현실의 규칙을 넘어 또 다른 세계선으로 ’사건이 없던 시간대‘를, <날씨의 아이>가 결국 일어났더라도 ’어떻게든 돌릴 수 있는‘ 모습을 보였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3.11은 결코 ‘수정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당시 후쿠시마를 비롯한 도호쿠 지역에 살며 직접 피해를 겪은 이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트라우마를 받았습니다. 대신 작품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재해를 사전에 막으려 하는, 직접적인 재해가 아니더리도 방황하는 지역에 ‘지속적인 일상‘이 있음을 말하며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그 ‘안정감’이 마련됨을 넌지시 꺼냅니다.
그것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축인 스튜디오 지브리의 여러 작품에 대한 직간접적인 오마주와도 이어지는 점이 있죠. 매우 직접적으로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온 마츠토야 유미의 노래 <루즈의 전언>을 꺼내더니 (하필 그 노래가 나올 때 <키키>의 모티브이자 메인 스폰서였던 야마토운수 로고까지 나오니, 은유로 숨기기는 커녕 많이들 알아줬으면 하는 느낌까지 듭니다.) ‘말하는 고양이’라는 캐릭터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를 연상케하는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 신적 존재의 형상화’나 ’거대한 사건에 맞서 자신의 희생을 결심하는 주인공‘이라는 존재에 이르기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꾸준히 지브리의 모티브를 아낌없이 드러냅니다.
지브리의 작품이 한편으로는 세카이계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그에 대한 헌사일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해의 기호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한 번, 그리고 자신을 바치며 막으려는 발걸음에서 한 번 각각의 모티브를 오마주하는 작품은 지브리의 작품에서 2020년대 현대 (특히 코로나-19라는 전세계적 재난까지 닥쳤던 지금) 를 말하기 위하여 하나의 상징을 꺼내려는 듯한 느낌까지 들고 맙니다.
물론 지브리에 대한 오마주와 별개로 차이는 분명하고, 이는 다시 이 작품이 지닌 한계와도 연결됩니다. 재난을 막으려는 ’보이지 않는 헌신‘에 대한 이미지적 구현과 연출은 분명 때때로 심금을 울리지만, 지브리의 작품이 재난이 일어나는 권역의 세세한 맥락을 살핀다면 (특히 고전 설화를 재해석한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적절한 터치처럼) 신카이의 이번 작품은 그 맥락은 없습니다. 명백히 사명을 지닌 이, 사명은 잘 몰라도 각각의 일상에서 충실하게 사는 이의 만남을 말하지만 자연재해가 다시 인적 재난으로 쉽게 연결되기도 쉬운 ‘사회’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피상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그저 각각의 개인이 원자처럼 보이다가도, 특정한 순간에서는 함께 뭉치고 돕는 ‘느슨하지만 끈끈한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복잡다단한 사회의 면모는 보이지 않은채 ’재난을 눈 앞에 둔 사람들‘만 남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것이 신카이가 만든 작품들 모두가 그랬지만 이 작품은 매우 직접적으로 실제의 시공간과 사건을 언급하니 그 괴리가 인상적인 이미지의 연출에 가려지긴 해도, 완전히 메워지지는 않습니다. 그 묘한 씁쓸함을 넘길 수 있다면 인상적으로 볼 수 있어도, 그렇지 못하다면 묘한 거스러미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변주는 이뤄졌지만, 다시 어떤 부분에서는 변주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관념을 답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일본에서의 이미 큰 흥행,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의 흥행 예보는 이미 그것이 하나의 ’시대정신‘일 수 있음을 보이는 어떤 ’예보‘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