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회고를 넘어, 영화와 삶의 POV가 겹쳐지는 순간을 조망하다
지금이야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하지만, 최소한 20세기 초중반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야 100여년 전에 고안된 것이라고 하지만, 퍼지는 데에는 꽤나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리고 <파벨만스>는 그러한 때에 인생 처음으로 움직이는 이미지의 스펙터클을 알게 된 소년의 시선에서 출발합니다. 새미 파벨만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가브리엘 라빌)이 1950년대 부모님과 함께 당시 헐리우드 대작인 <지상 최대의 쇼>를 봅니다. 영화를 그때 처음 알게된 소년은 기차가 부딪쳐 마구 요동치는 장면에 매료되고, 어머니 미치(미셸 윌리엄스)의 권유로 당시 RCA에 다니던 아버지 버트(폴 다노)의 8mm 카메라로 모형 기차가 부딛치는 장면을 찍더니 가족들을 모아 나름대로 특수효과도 고안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계속 찍기 시작합니다.
중학생이 되서도 영화에 계속 몰두하는 새미는 보이스카우트에서 만난 친구들을 모아 더욱 스케일 큰 영화를 만들고, 용돈을 긁어모아 죄다 더 좋은 촬영과 편집 장비, 필름을 만드는데 쏟아붇고 있죠. 하지만 무언가를 찍는다는 것은 화려한 액션과 블록버스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피사체는 때로는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카메라가 현실을 비출 때 생각치도 못했던 비현실과 같은 상황을 비추고 말고. 동시에 이러한 순간은 새미 자신에 있어도 자신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민하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새미는 영화를 찍으며 자신이 지닌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탐닉에 흥분하고, 다시 그 ‘의미하는 바’를 무엇인지를 재인식하는지를 조금씩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무언가를 찍고 장면을 잘라 편집하는 행위가, 때로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가 현실에 있는 존재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이미 스필버그 본인이 말했다 시피 <파벨만스>는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작품입니다. 스필버드 자신을 모티브로 한 새미 파벨만을 비롯해 어느 정도 변주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극중 새미가 스카우트 친구들과 찍은 <Escape to Nowhere>(도피할 수 없는 탈출)은 지금도 인터넷을 찾으면 바로 볼 수 있는 등 상당수의 장면은 스필버그가 실제 어릴 때 겪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https://m.youtube.com/watch?v=pI3431fetiM&feature=youtu.be
매우 어린 나이에 영화를 알아 그때부터 영화를 만들기를 즐겨한 소년의 이야기라는 영화라는 점은, 왠지 모르게 정말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영화에 대한 영화‘ 같기도 하죠. 특히 늙은 감독들일수록 시도하는 그러한 회고적 부류의 작품말이죠. 하지만 영화는 영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새미가 영화 촬영을 시도할 때부터 뭔가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영화에 대한 매력과 애정을 쏟아붇는 것을 넘어, 이 ‘촬영과 편집의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현실과 영향을 미치고 결코 이를 분리하여 볼 수 없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영향은 때로는 ‘그럴 듯한 장면’을 찍기 위해 동생들에게 가짜로 비명을 지르기 위해 엄마를 놀라게 하거나 집안의 두루마리 휴지를 동내는 해프닝으로 끝나가도 합니다.
그러나 새미가 점차 세상의 물정을 알게 될수록 영향은 사소한 수준을 넘어 새미 자신에게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의 문제로 점차 넓어집니다. 누군가에겐 그저 사소한 촬영과 편집일수 있지만 촬영의 결과물이, 그리고 최종적인 편집된 완성품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순간 그 영향은 결국 새미 개인에게 멈추는 것이 아니니까요. 설사 그 촬영된 장면이 처음부터 고안된 스토리보드가 아니라, 현실에서 우연히 포착된 장면이라 하더라도요.
영화는 그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는 새미의 모습에 밀착해있어요. 자세히 따져보면 작중에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들은 새미가 순간을 인지하고 있거나, 새미가 직접 맞닥뜨린 순간들로 초점이 맞춰져 있기도 하고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는 사소한 순간마저도 타인의 시선을 전지적 시점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새미가 직접 눈으로 들여다 볼때만 카메라가 담고 스크린으로 구현이 되듯, 작품은 철저히 새미의 ‘시선’(Point of View, POV)에 기초해있어요.
영화 이론에서 POV는 촬영과 편집을 거쳐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드러나는 모습과 이어져 있지만, 그 POV는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아무리 떨어지고 싶어도 겹쳐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셀이나 CG 애니메이션처럼 실물을 비추는 것이 아닌 영상일지라도, 완벽히 삶에서 떨어질 수 없듯.) 그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새미는 계속 매사마다 특정한 시선으로 무언가를 봐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순간은 비단 새미의 것이 아니죠. 새미의 동생이나 부모인 미치와 버트도, 부모와 매우 절친한 베니(세스 로건)도, 새미가 고등학교에서 사랑에 빠진 모니카(클로에 이스트)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계속 마주치는 일상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새미의 POV는 남들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같지 않아요. 그는 자신만의 무빙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는 무언가를 POV를 워해 찍고, 찍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촬영된 컷들을 자르고 붙이면서 그 모습의 어떤 장면을 강조하거나 뭉갤 것인지,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하여 카메라가 기록하고 스크린으로 비춰지는 피사체에게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기 될지도 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새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다시 그 둘과 다른 길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길은 미치의 삼촌이자, 서커스 단원이자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보리스(주드 허쉬)와도 같지 않을 것임을 말이죠. 새미는 영화의 기획부터 촬영부터 편집을 모두 거쳐 하나의 작품을 만듬으로서, 그 과정과 결부된 삶의 단락을 마주치면서 시선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느꼈기 때문입니다.
<파벨만스>는 그렇게 영화 촬영에 대한 이야기와 1950-60년대를 거치며 조금씩 성장하는 소년의 이아기를 분리하지 않고 매우 유기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화가 매우 선구적이며 유려한 영상의 중요 매체였던 시절, 영상의 매력에 빠진 사람은 ‘시선의 재구성’을 결국 삶으로 부딛치며 이해하게 됨을 강조하는 듯 말이죠. 그러한 이해와 성장에 맞춰 영화 역시도 기본적으로는 드라마에 가깝지만, 플롯의 구성이나 촬영에 있어 영화의 문법을 현실의 삶과 점차 대입되는 형식으로 자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중반부 새미가 우연히 홈비디오 카메라에 쉽게 넘기기 어려운 장면이 기록되어있음을 알고 결국 일정한 파국을 맞이하기 까지 연속되어 이어지는 시퀀스 말이죠. 어찌보면 통속적일 수 있지만 장르적으로는 조금은 서스펜스의 장르로서, 동시에 그에 결부된 인물들의 행보를 새미의 시선이자 그에 연동된 영화의 POV와 합쳐내어 움직이는 흐름은 영화가 지닌 복합적인 맥락이 무엇인지를 영화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 없이도 인상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요.
그렇게 ‘시선’으로서 영화와 현실의 삶을 접합하는 <파벨만스>의 모습은 영화 자체는 물론, 영화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사람에게도, 이를 카메라와 스크린 외부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영화‘를’ 들여다보는- 다시 때로는 영화’에게‘ 보여지는 사람도 함께 말입니다.
그 ’겹침‘의 순간을 스필버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관록을 통해 최대한 카메라 너머로 느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이제는 영상을 영화관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하나씩 손에 지닌 ‘카메라와 스크린이 동시에 달린 연산장치’를 통해 매우 쉽고 간편하게 볼 수 있게 된 상황에서도 변주된 형태로 각자에게 나타날 수 있음을 함께 말이죠. 이래저래 영화와 함께하는 삶을 보낸 사람이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 수단으로 건네는, 자신이 일평생 바친 미디어에 바치는 헌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