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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May 15. 2023

다르덴 형제 <토리와 로키타> 단평 : 영화 밖의 맥락

전작들과 이어지면서도 더욱 어두워진, 다르덴 형제의 리얼리즘적 시선.

영국에 켄 로치가 있다면, 벨기에에는 다르덴 형제가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노년의 나이가 된 지금까지 꾸준히 노동과 사회를 리얼리즘의 어법으로 말하는 작품을 연출, 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다르덴 형제에게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면 좀 더 여성, 청소년, 이주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일 것입니다. 형제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로제타>부터 이번 작품까지 계속 위의 세 요소와 이어지는 작품을 만들고 있죠.


특히 <언노운 걸>부터는 이주민의 이야기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언노운 걸>이 여성-이주민-청소년의 죽음을 알게 되며 이에 접근하는 여성-백인-성인 의사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그러한 접근이 이전 다르덴 형제의 작품과 달리 관조적이라는 지적이 있었죠.) <소년 아메드>는 이주지에서 한 명의 구성원으로 함께 사는 것이 버거운 이주민 소년이 극단주의적 종교의 유혹에 빠져드는 모습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토리와 로키타>에서는 여성-이주민-청소년이 <소년 아메드>와는 또 다른 이유로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러기에 또 다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그립니다.



토리(파블로 실스)와 로키타(졸리 음분두)는 남매입니다. 아니, 절친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요. 나이가 어린 토리는 어떻게 난민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로키타는 체류 자격 심사에서 계속 토리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점을 입증하지 못히기 때문입니다. 둘이 서로 체류 심사 준비를 해도 심사를 통과하는 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매는 둘을 벨기에에 밀입국하도록 도운 브로커 일당에게 시달리고, 다시 로키타는 고향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낼 돈을 벌기 위해 토리와 함께 음성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일은 때로는 로키타에게 성적인 폭력에 시달리도록, 그리고 조금이라도 뒤틀리는 순간 삶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둘은 벨기에에서 도저히 버티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주민의 불법적인 일을 보인다는 점에서 작품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흔히 보이는, 한국에서도 <청년경찰>이나 <범죄도시> 같은 작품이 보이는 ‘범죄에 뛰어든 이주민‘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장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범죄를 ’일망타진해아 할 것‘이나 ‘주인공의 통쾌함‘을 보이기 위한 느와르나 액션의 도구로 쓰인다면, 이 작품은 그러한 장르적 어법을 배제하고서 ‘음성적 행위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이주민 청소년‘을 그리는 것입니다.


장르의 문법이 제거된 자리에 리얼리즘적으로 그려진 현실의 어두움에 통쾌함은 없습니다. 대신 개인이 온전한 개인으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같은 지에 놓인 서로가 최대한 서로를 도우려해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막막함이 남습니다. 물론 ‘악인‘과 ’긴장감‘은 존재하죠. 이주민인 청소년이 도무지 맞서기 어려운, 주변에서 이들을 소탕할 ’선인‘을 만나기 어려운 현실적인 악인과, 언제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킬지 모르며 뚜렷한 기승전결이나 절정의 해소 같은 것은 없는 갑갑하며 지리한 긴장감 말입니다.


게다가 주인공들을 감싸는 것은 ‘악인임이 분명한 어른들의 악의’만이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아도, 결국 이들이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들며 교묘하게 이주민을 배제하는 ‘객관으로 포장된 제도와 구조의 악의’도 이들을 짓누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조금이라도 변화의 실마리를 보여준 두 편의 전작과 달리, 이미 불안했던 모든 일들이 벌어진 막막한 상황에서 영화를 마무리짓습니다.



전작들보다 더욱 어두워진 색채는 어떤 점에서는 이주민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타오르는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의 분위기를 담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일본 내의 재일한국인-조선인이 그런 것처럼 실제로도 이주민 청소년이 쉽게 사회의 어둠으로 빠지기 좋은 상황에서 이에서 쉽게 ‘희망’을 말하는 것이 결코 쉽게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 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전작들보다 더욱 어두운 이야기를 하는 상황에서, 작품은 ‘폭력‘을 묘사함에 있어 이를 그저 표면적으로 자극을 강조하기 보다는 은유적으로 담아내며 폭력적 행위 자체가 담지하는 소름끼치는 심리에 주목하는 등 그저 ‘문제적 상황’ 그 자체만 놓고 말하는 대신 그 상황을 낳게 한 ‘맥락’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맥락은 실제 이 작품이 제작되고 상영되는 현실에 기반을 두며, 영화가 남기는 답답한 상황을 진정으로 풀기 위해서는 스크린 밖을 함께 아울러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향에서 ‘영화가 영화 내적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원래도 영화 내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주장을 전하고 사회를 뒤흔드는 매체로서도 기능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켄 로치와 더불어 그런 입장을 숨기지 않고, 사회운동적인 차원에서 영화를 말하는 사람이었고요. 점차 만들고, 개봉하는 것이 어렵지만 ‘영화 밖을 뚜렷하게 바라보는 영화가 있음’을 <토리와 로키타>는, 그 이외에도 한국을 비롯한 여기저기서 제작되는 작품들은 이를 넌지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미 족히 20년 넘게 이주민이 함께 살고 있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보다도 더욱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고민도, 이를 실현하는 정책적인 실천도 현저하게 적은 한국에서는 더욱 이 ‘작품 밖으로 뻗치는 맥락’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 여러모로 불편한 지점이 있지만, 그 불편은 작중에 드러나는 현실의 어두움과 답답함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음을 말하는 문제제기로서의 ‘불편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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