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총괄 프로듀싱으로 제작된 옴니버스, 동물부터 여성 혐오까지의 말들
윤성호가 간만에 영화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윤성호가 영상을 안 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영화관'으로, 혼자가 아니라 다른 연출자들하고 함께 간만에 나들이를 한 것이죠. 단편 <우익청년 윤성호>로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고, 이후 <은하해방전선>과 <도약선생>을 통해 자신만의 '말로 쌓아 올라가는 세계'를 구축했던 윤성호는 2010년 이후 어딘가 좀 독특한 행보를 계속 걷게 됩니다. <두근두근 영춘권> 같이 초단편 작업을 하는가 하면,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같이 케이블 시트콤 작업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2010년대 이후의 윤성호를 말하기 위해서는 '웹드라마(또는 웹시트콤)'을 결코 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원작도 인디 시트콤으로 제작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한국 웹드라마의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은 물론 초기 장르-영역의 형성해 큰 영향을 준 <출출한 여자>를 만든 이래 꾸준히 윤성호는 웹드라마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이제는 거의 사업을 접은) 유튜브 오리지널 드라마이자 동명 웹소설 원작으로 <탑 매니지먼트>도 만들고, 웨이브를 통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작품 등을 비롯해 웹시트콤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시트콤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죠.
그렇게 웹을 자신의 무대로 활동하던 윤성호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를 통헤 오래간만의 극장에 걸리는 작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물론 주무대가 웹일 뿐이지, 완벽하게 영화관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의 프롤로그로 배치된 2018년 <두근두근 외주용역> 같은 작품도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장르로 내건 작품은 2010년대 이후 만들어온 작품 중에서 극히 일부에, 그것도 단편에 치중되었던 상황에서 좀 더 '긴' 작업을 들고 영화관에 돌아온 것입니다.
다만 그냥 돌아온 건 아닙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의 공동 연출자 목록에 윤성호가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앞서 말한대로 윤성호의 프롤로그 단편은 이번 작업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 놓은 단편을 프롤로그 식으로 덧붙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윤성호의 '총괄 프로듀서'로서의 면모가 좀 더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이 작품은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KB국민은행의 지원을 통해 '굿 쇼츠, 굿 임팩트'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기도 합니다. '주목받는 신예감독 6인'에게 '반나절 동안, 단 한 씬만 찍는 조건'으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의 저예산 옴니버스 단편을 만들기로 한 것이죠. 동시에 코로나-19가 아직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 이래저래 기업과 연계한 제작 지원 프로젝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굿 쇼츠, 굿 임팩트'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되어 2022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하고,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신예감독 6인'을 모으는 건 잘 안되었던지 이미 <게몽영화>에 상업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까지 연출한 상태였던 박동훈이 들어갔고, 그래도 뭔가 어려웠던지 6인 중 한 명에는 윤성호 본인이 이미 만들어 뒀던 단편을 채웠습니다. 뭔가 사정이 있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는 이래저래 그간 서울독립영화제가 관여했던 단편 옴니버스 프로젝트 중에서는 꽤나 기획의 밀도가 잘 살아있는 것은 물론 작품별 편차가 고른 편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프로듀서 활동을 했던 윤성호가 이 기획의 총괄을 맡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모든 이야기를 마쳐야 하는 제약조건이 여러모로 기획을 구현하는 것에 있어서는 좋은 작용을 한 느낌이기도 하죠. 덕분에 감독은 제각기 달라도,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 수록된 6편의 단편은 윤성호의 향기가 정말 강하게 풍깁니다. 두 명의 인물, 많이 등장해도 세 명의 '존재' (그런데 제작 전 기준을 짜기라도 한 듯이 한 명의 '존재'는 거의 말이 없거나 극 중에서 대화에 직접적으로 잘 참여하지 않습니다.) 만 등장하는 가운데 오로지 상황과 대화, 그리고 맥락으로 승부하는 전개가 더욱 윤성호의 영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감독-작품별 편차는 꽤 존재합니다. 프롤로그로 배치된 <두근두근 외주용역>은 윤성호가 이번 옴니버스를 총괄하며 세운 하나의 '기준선'과도 같은 작품이죠. 번지르르한 말들이 채 몇 시퀀스도 가지 않아서 무너지거나,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고, 사실을 겉으로 들어나는 발화 이상으로 말 뒤로 숨겨진 상황들이 함께 자아내는 블랙 코미디의 감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이드라인 아래 제작된 작품은 분명 윤성호가 관여하기는 했지만, 각 에피소드별 감독이나 각본진의 감각은 윤성호의 터치가 여러 갈래로 변주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예를 들면 작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박동훈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처럼 말입니다. 박동훈의 이전 독립 장편 <계몽영화>처럼 작품은 가장 직설적이자, 가장 노골적으로 시니컬한 자세로 각 등장인물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죠. 제한된 촬영과 각본의 조건에서 절제는 되어 있지만 <계몽영화>의 2020년대 버젼이라는 생각이 상당히 강하게 드는 수록작이긴 합니다. 김소형의 <하리보>처럼 소품들로 가득한 수록작 중에서, 이미 헤어지기로 결정한 커플과 그들이 같이 기르던 고양이 '하리보' 사이의 이야기를 그리며 좀 더 미시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품도 있죠.
하지만 앞서 강조했다시피 이 편차는 질이 심각하게 날 정도로 차이가 큰 편차는 아닙니다. 윤성호가 제시한 하나의 방향성을 각각의 감독들이 재해석을 하며 일정한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죠. 무엇보다 괜찮은 것은 박동훈의 작품처럼 정말 직설에 가깝게 풍자의 대상을 드러내는 작품뿐만 아니라, 좀 더 은유적이고 영상물의 문법에 맞춰 전개되는 작품도 연출-각본-프로듀싱의 적절한 조합을 통해 마냥 무겁지 않은 자세에서 근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문제를 참신하게 건드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저 소리만 높여 이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 거시적인 사회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 문제들이 어떻게 미시적인 영역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죠.
그러한 점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최하나의 <진정성 실전편>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2016년 나딕게임즈 개발-넥슨 퍼블리싱의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에 등장하는 성우를 집단적으로 혐오 공격을 한 이래 GS25의 손가락 표현에 대해 이상한 남성 혐오의 딱지를 다는 혐오적 공격을 이렇게나 위트가 있으면서도, 씁쓸하게 다룬 작품이 있었을까 싶어요. 10분 남짓한 작품 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백래시, 이를 이유로 벌어지는 무수한 노동 문제, 다시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개인 차원의 의문들이 잘 구성된 영화라는 형태로 관객들 앞에 제시되는 것입니다. 다른 단편들도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극영화라는 형태를 유지하며 다양한 사회의 현실에 다가서고 접근하는 전략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잘 유지해 나갑니다.
그렇게 이 6편의 단편들은 이 자품이 제작된 의도인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영화'로서 풀어내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근래 사회 문제를 말한다는 한국 영화 다수의 실책처럼 그저 문제를 직설적으로 자극하며 감정적인 차원만으로 분노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또는 영상의 차원에서 구현할 수 있는 방향성을 깊게 파고 들며 한정된 시퀀스에서 널찍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이래저래 이것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윤성호의 공이긴 할 것입니다. 오랜 시간 영화판을 떠났지만, 오히려 그러기에 영상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넓고 멀리 볼 수 있었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제한 조건을 그저 '제한된' 조건이 아니라 뾰족한 이야기로서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낸 참여 감독들의 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앞으로가 더 주목이 되죠. 이래저래 (한국의) 영상이 좋게 말하면 하나의 전기, 나쁘게 말하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상황에서 영상이 가야할 방향성에 하나의 가이드를 제시한 작품이기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