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원작을 잘 살린 비주얼, 여운을 느끼기엔 참 급하다
<정령의 수호자> <짐승의 수호자 에린> 같이 동양풍 판타지 소설을 쓰며 유명세를 얻은 작가이자 인류학자기도 한 우에하시 나호코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이 작품도 역시 동양풍 판타지인데, 특이하게 의료적인 소재도 함께 담겨있어요. 그것도 공교롭게도 ‘전염병’에 맞서는 의사입니다. 소설은 원래 2014년에 처음 나왔고, 애니메이션은 2020년 가을 경에 개봉하려다 코로나-19로 계속 밀려 일본에서는 작년 2월에서야 겨우 개봉했으니 일부러 노리고 만든 건 아닌데 참 묘하게 되었죠.
제작사는 우에하시 나호코의 소설들을 이전에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프로덕션I.G가, 연출자는 스튜디오 지브리나 곤 사토시의 작업에 주로 참여했던 안도 마사시와 <후세 :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연출했던 미야지 마사유키가 맡았습니다. 그래서 홍보도 안도 마사시가 참여한 지브리의 작업을 강조하고, 몇몇 캐릭터 조형도 지브리 느낌이 나긴 하죠.
안도 마사시 뿐만 아니라 제작 스태프 중에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 참여한 스태프가 많다 보니 일단 비주얼적인 측면은 참으로 좋습니다. 이전에도 프로덕션I.G가 만들었던 <정령의 수호자> 같은 우에하시 나호코 원작 애니메이션은 원작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살렸지만 이번 작품은 액션을 비롯한 동적인 요소에도 힘을 주는 부분이 있다보니 더욱 생동감이 넘칩니다. 가상의 동양풍 국가를 구현하는 인물이나 배경의 디자인도 꽤 그럴듯 하고요.
그렇게 ‘볼 맛’이 나는 건 좋은데, 문제는 작품에 장면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쉼표’가 그다지 없다는 것입니다. 러닝타임이 114분이니 별로 짧은 작품도 아닌데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가 참으로 짧은 호흡으로 이어집니다. 후다닥 이어지는 흐름이 계속되니 몇몇 부분은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느낌까지 들기도 해요.
물론 이해가 가긴 합니다. 한국어판 기준으로 2권 합쳐 1000페이지에 가까운 작품을 기승전결 모두 살려 2시간 안팍으로 작품를 만들려면 이럴 수 밖엔 없을테니까요. 제작진들이 정말 갖은 수를 내서 어떻게든 원작의 메인 이벤트를 담아내려 하고, 장면 단위로 뜯어보면 꽤나 그럴 듯 하게 그려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포기하게 되는 것도 많죠. 방대한 쪽수만큼 설정이 꽤 어마어마한 원작인데 어떻게든 2시간 내에 욱여 넣어야 하니 쉴 틈 없는 전개처럼 쉴 틈 없이 인물, 배경, 사건에 대한 정보가 쏟아집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너무 리듬이 늘어지지 않게 하려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고도 시퀀스를 제시해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만드려 노력은 하는데 이미 작품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보니 집중력을 조금만 잃으면 이야기의 행방을 쉽게 놓치기도 좋은 구도에요. 그나마 원작은 일본에서는 25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니 대놓고 ‘원작 본 사람만 오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속도는 작품의 진중한 분위기에 비하면 참으로 이질적이라서 더욱 붕뜨고 맙니다.
이런 전개에서 원작에서는 꽤 참신한 연결이었던 ‘짐승의 힘을 이은 부족의 계승자’와 ‘두 민족 사이의 갈등’, 그리고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전염병에 맞서는 의사‘라는 좀 더 유기적으로 합쳐질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일단 비주얼은 분명 좋으니 이국적인 세계관에서 현대적 느낌이 드는 의료라는 소재를 자연스렵게 꺼내는 모습을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서사적인 전개가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로의 흐름으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서사는 정말 상업 작품이나 분위기의 구현을 위한 최소 조건 같은 느낌까지 듭니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비주얼이 전면에 등장하는 작품을 말함에 있어 서사만을 강조해 보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만, 이 작품처럼 비주얼의 연결로 서사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정말 여러모로 묘한 느낌을 가져옵니다.
애초에 대하 서사극에 가까운 분량의 원작인 만큼 이전 우에하시 나호코의 원작 애니메이션처럼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거나, 못해도 2부작으로 만드는게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물론 실제 제작 현장에서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죠. 어떤 의미로는 짧은 호흡의 작품이 인기를 얻는 시대인 만큼 개별적으로는 그럴듯한 숏폼 영상을 연이어 보는 느낌으로 작품을 만들고자 시고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어떤 의미로는, OTT나 VOD를 통해 몇 번은 뒤로 되돌려가며 봐야 할 작품이 영화관에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이야말로 2020년대를 상징하는 애니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