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베어 베어스> 연출자의 신작, 더욱 능숙하게 자연의 이야기를 풀다.
<호퍼스>를 말하기 위해서는 연출이자 각본에도 참여한 다니엘 총(Daniel Chong)에 대해서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한때 꽤나 인기 있었던 워너 브러더스 계열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카툰네트워크’를 통해 방영된 <위 베어 베어스>(2015 ~ 2019)를 만든 사람이니까요. 모두 종으로는 곰이지만 종족도 회색곰, 판다, 북극곰으로 서로 다르고, 성격도 제각기 다르지만 같은 집에서 살고 다른 동물들이나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들을 재치있고 재미있게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상당히 인기가 좋은 작품이었지만, 워너 브러더스는 2019년을 끝으로 작품 제작을 마쳤고, 대신 이 작품의 프리퀄 스핀 오픤 <위 베이비 베어스>를 만들고 있어요. 하지만 이전과 같은 인기도, 퀄리티도 모두 사라진 상황입니다.
<위 베어 베어스>가 인기를 모았던 것은 동물의 생태를 절묘하게 인간의 삶과 교잡하면서 웃음을 낳았던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작품에서 거의 레귤러 수준으로 등장하는 여자아이를 한국인으로 설정하면서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그간 미국 영상물에서 중요 인물로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보다도 나오기 어려웠던 아시아인을 출연시키는 등 성별, 인종, 이외 각종 정신 증후군 등 미국 사회나 다른 사회에서도 분명 존재하지만 여타의 영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특성들을 작품에 거리낌 없이 드러낸 점도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중요 조연으로 등장하다 보니 작품에 한국식 찜질방 이야기나 한국 요리 조리법이 나오기도 했었죠. 이 때문에 다니엘 총이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냐는 말도 돌았고요. (실제로는 싱가포르계 화교 미국인 가정 출신입니다.)
하지만 <위 베어 베어스>는 인기에 대비해서 꽤 빨리 마무리 되었고, 그 사이 다니엘 총은 워너-카툰 네트워크와 멀어지는 대신 본래 커리어를 시작했던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작품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에 공개되었던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시작으로 <버즈 라이트이어>, <엘리멘탈>, <인사이드 아웃 2>, <엘리오>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이제 극장 개봉작으로는 첫 연출작인 <호퍼스>를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호퍼스>는 여러모로 다니엘 총의 대표작인 <위 베어 베어스>를 떠오르게 합니다. 물론 다른 점도 많죠. 2D 디지털 셀 애니메이션이었던 <위 베어 베어스>와 달리 이 작품은 픽사의 장기인 3D 애니메이션이고, 전자는 일상 드라마에 가까웠다면 이 작품은 약 100분 안에 기승전결을 확실하게 드러내야 하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동물의 생태계와 습성에 확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동물 캐릭터에 강한 특성들을 만들고, 동물과 인간이 서로 부대끼고 그로 인해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을 다루고, 아시아계 여성 캐릭터가 스토리의 중심에 서고,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무릎을 팍 칠 정도로 강렬한 장르 코드의 삽입과 패러디라는 요소에서는 상당히 비슷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왜 인간이 인간 외의 다른 생명들을 상기해야 하고, 같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실 이런 코드들을 은근히 드러냈던 <위 베어 베어스>보다 장르 코드를 드러내는 감각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메인 포스터에는 안 쓰였지만 서브 포스터나, 작품이 맨 처음 시작하자 드러나는 오프닝,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여러모러 호러 영화의 감각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몇몇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조 단체의 <그렘린>과 같은 호러 코미디 영화가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 뭔가 비밀스러운 과학 연구의 결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도 떠오르죠. 모두 로봇에게 행사하는 장면들이라 등급 결정에서는 유리하게 작동했겠지만 장기가 터져나가는 등 생각 이상으로 폭력적인 장면도 강합니다. 꽤나 폭발하는 장면도 많이 나오고요. 무엇보다 이제는 장수 컬트 B급 호러 액션 코미디로 정착한 <샤크네이도> 시리즈의 패러디가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렇게 장르의 향취가, 그것도 B급 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의 분위기가 강한데 이를 전체 관람가용 스토리와 연출로 여며내는 감각이 상당히 탁월합니다. 이는 어찌 보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캐릭터의 존재와 특성, 스토리 라인과 이미지 연출이 필요한지를 깊게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품은 앞서 말했듯이 환경 파괴 문제를 정면으로 짚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버들이 많았으면 도시 이름도 ‘비버’를 따서 짓게 된 ‘비버턴’(Beaverton, 참고로 가상의 도시가 아닙니다. 실제 미국 오리건주에 존재하는 도시라고. 위키피디아를 보니 정말로 비버들이 많아서 원주민들이 본래 붙였던 마을 이름도 ‘비버들의 장소’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에서 비버들이 본래 살고 있던 서식지에 고가 고속도로를 지으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동물과 자연을 사랑해 온 아시아계 여성 대학생인 주인공 ‘메이블’(파이퍼 커다 / 장미)은 도저히 이 모습을 눈뜨고 지켜볼 수 없습니다. 높은 주민 지지율로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하는 비버턴의 시장 ‘제리 제네라초’(존 햄 / 최한)에게 맞서 온갖 시위에 캠페인을 하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학교에서 비밀리에 벌어지던 연구를 알게 되면서, 메이블은 비버 모양 로봇으로 영혼이 옮겨지게 됩니다. 추측으로만 알 수 있던 동물들의 목소리도 모국어처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인간의 사회도 메마른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렇다고 동물의 사회가 안온한 것도 아닙니다. 외부에 적대적이고, 약육강식의 논리도 더욱 쉽게 작동합니다. 인간들의 힘에 비교하면 동물들은 많이 약해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생태계와 사회에 아무런 걱정과 근심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메이블은 그저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동물로 변신해 이들의 사회에서 함께하게 되었지만, 메이블이 원하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저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요. 어떻게 같이 공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메이블을 기다릴 새도 없이 동물과 자연의 공간에 자신들의 터전을 박아놓는 삶을 오랜 시간 영위한 인간들은 그간 익숙한 방식대로, 그동안 인간에게 ‘당해왔던’ 역사가 있는 동물은 동물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밀어붙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무수한 해프닝과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한 해프닝들의 연속에서 연출진은 자연스럽게 기발한 코미디와 때로는 섬뜩한 감각을 낳는 호러적인 요소들을 쉽게 붕뜨지 않도록 적재적소에 심어놓습니다. 코미디나 호러가 그냥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의 흐름에 맞게 정말 적절한 리듬과 타이밍에 맞춰서 삽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장면들은 잘라서 장면 단위로 봐도 흥미롭지만, 하나의 연속된 장편 작품으로 봐도 매우 유려하게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장편 영상이나 서사를 구상함에 있어 어떻게 갖가지 요소를 넣으면서도 튀지 않고 최종적으로는 안정된 결과물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질 좋은 교보재와도 같습니다. 여러모로 <위 베어 베어스> 때 시도했던 연출들이 <호퍼스>에 와서 보다 기발하면서도 안정적인 감각으로 잘 다져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호퍼스>는 2020년대에도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명성은 계속 유지될 것임을 선언하는 작품과도 같습니다. 3D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이자 선두 주자였던 픽사답게 3D 모델링이나 이펙트는 정말 최고의 수준이고, 명암의 대비나 원근에 대한 표현도 더욱 물이 올랐습니다. 동시에 <월-E> 등에서 드러냈던 것처럼 이 작품이 나오는 사회상에 대한 날카롭고 통렬한 풍자의 감각도 여전합니다. 그런 점들이 트럼프 본인이나 트럼프를 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 등에게는 불편함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애초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우라고 만든 작품이니까요. 어떤 점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사회가 무수한 혼란에 시달리고, 이에 대형 영상 자본들도 마구 휩쓸리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픽사 스튜디오는 자신들의 주관을 쉽게 놓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덤. <호퍼스>는 한국 한정으로는 뭔가 달라진 시대상을 보여주는 작품 같기도 합니다. 픽사 스튜디오는 아니었지만 2014년 디즈니에서 제작, 개봉했던 <빅 히어로>에서 주인공 형제가 일본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본래 성이 ‘하마다’인데, 대놓고 이유를 밝힌 것은 아니지만 추측상 ‘왜색’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한국 개봉판 한정으로 ‘하마다’를 ‘아르마다’로 바꾼 일이 있었죠.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텍스트 표기는 물론이고 아예 본사 차원에서 영어 대사까지 한국판 전용으로 이름을 재더빙했습니다.
그런데 <호퍼스>에서 주인공 메이블의 할머니도 아무래도 일본계 미국인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지 (이름인지 성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타나카’라고 등장합니다. <빅 히어로>의 사례를 생각하면 수정을 한다면 할 수야 있겠는데, 한국판에서도 그냥 별다른 수정 없이 ‘타나카’라고 나옵니다. 만약 이 작품이 <빅 히어로>가 개봉했던 2010년대 중반이나, 특히 2019년 즈음에 개봉했으면 과연 수정이 없었을까요.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래저래 <빅 히어로> 한국판의 수정과는 대조될 수 밖에는 없는 모습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