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나가는 장르 요소의 총집합, TV 애니메이션처럼 유려한 조화로.
2018년에 첫 번째 시즌, 2021년에 두 번째 시즌이 방송되어, 일본에선 2025년, 한국에서는 올해 극장판까지 나온 애니메이션 <좀비 랜드 사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지순례’라는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통상적으로는 어떤 종교에 있어 중요한 성지를 종교적인 목적 등으로 방문하는 여정을 말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부터 애니메이션 등 일본에서 번성한 시각 서브컬처에서는 의미가 다른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해당 작품의 팬들이 직접적으로 작품에서 언급되거나, 그렇지 않아도 실제 존재하는 장소나 공간에서 많이 모티브를 느낌이 나온 장소에 방문하는 일이 사회적 현상으로 불러도 손색 없을 정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쨍한 햇볕이 비치며 바다가 보이는 철도 건널목’으로 유명한 <슬램덩크>의 쇼난 해변, <하이큐!!> 주인공들이 거주하는 미야기현, 그리고 <러브라이브! 선샤인!!>의 주 무대로 채택되며 관광에서 엄청난 성과를 낳았던 시즈오카현 누마즈시가 그런 ‘성지순례’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런 마당이니 당연히 처음 작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자체와 협력해 ‘성지순례’ 효과를 노리는 작품이 2010년대 이후 정말 틈만 나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러브라이브! 선샤인!!>에 주된 장소로 등장하는 누마즈시는 도시 자체는 커도 후지산 등산객들이나 해변 정도를 제외하면 큰 관광 거리는 없었는데, 작품의 발표 이후 엄청난 관광 파급 효과를 낳은 사례가 정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듯이, 성지순례 효과를 노린 작품들이 전부 성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작품이 그 자체로 흥미롭고 재미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래야 진정으로 노렸던 성지순례가 탄생하게 되는 거니까요.
<좀비 랜드 사가>는 이런 성지순례 효과를 노린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정말 분위기가 다른 작품들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평범한 아이돌 성장물인 줄 알았더니,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10년이 지나 좀비로 부활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호러물로 튼 것 같지만, 급커브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좀비로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작품의 주무대이자 작품의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일본 규슈 지역에서 정말 손꼽히게 인지도가 낮아 인구 감소가 멈추지 않는 ‘사가현’의 부흥을 위한 지역 아이돌로 만들기 위해서에요. 심지어는 주인공 말고도 다양한 시대에서 별의별 이유로 사망한 사람들을 좀비로 부활시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프랑슈슈’라는 그룹명으로 활동을 하면서 아이돌로서도 성공하고, 사가현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자신들이 좀비라는 것을 숨겨야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대체 무슨 작품인지 전혀 상상이 안 갈 겁니다. 분명 좀비가 등장하니 좀비물일 것 같고 실제로도 좀비의 호러 코드를 사용한 시퀀스도 있는데 완벽한 호러물은 또 아닙니다. 작품은 저마다 다양한 사정로 점철되어 끝내 사망한 과거사를 지녔지만, 어쨌든 한 그룹으로 모인 아이돌의 성장담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좀비와 같이 호러 등 여러 장르에서 쓰여왔던 각종 클리셰나 코드를 넣고, 다시 이 작품의 또 다른 중요 목적인 ‘사가현’ 홍보에도 무척이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정말 TV 애니메이션은 처음 시작하면서 끝날 때까지 어디로 튈지 짐작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작품에 <체인소맨> 등 퀄리티 높은 애니메이션을 주로 만들어 온 MAPPA, 일본 대형 기획사 에이벡스, 덴츠·하쿠호도에 이어 일본 3대 홍보 마케팅사인 사이버에이전트 계열의 게임 제작사 사이게임즈, 그리고 당연하지만 사가현도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극장판에는 소위 일본 3대 영화사인 도에이까지 붙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작품은 B급 특유의 막나가는 정서가 강해도, 이야기를 풀고 연출하는 솜씨가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변주가 상당히 많이 걸려있고 걸핏하면 코미디나 장르적인 패러디 장면이 넘쳐 나지만 저마다 여러 사정과 상처를 지니며 현시대에 좀비로서 부활한 이들이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하나의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하는지의 서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연출의 측면에 있어서도 질 좋은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명성이 이미 높았던 MAPPA 답게 2D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는 준수했고, 라이브 장면 등에서 사용된 3D도 2D의 장면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유려하게 제작되었습니다. 본래 작품을 기획한 제작진들 조차도 큰 흥행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원래는 투자가 진행되지 않아 엎어질뻔 하다가, 제작비를 유치하기 위해서 넣은게 ‘사가현 홍보’ 요소라고 하죠.) 상상 이상의 호응이 이어지며 2기 제작은 물론, 급기야 극장판까지 제작되었습니다.
이번 극장판 역시도 TV 애니메이션처럼 막나갑니다. 딱히 아무런 볼거리나 중요성도 낮은 사가현에 갑자기 우주 엑스포가 유치되고 (이건 아무래도 일본에서 개봉한 2025년 그 해 오사카 간사이 엑스포가 열린 것의 패러디겠죠.) 좀비 아이돌 그룹 프랑슈슈가 엑스포 홍보 대사가 되어 열심히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가 연상되는 거대하고 납작한 형상의 우주선이 등장하더니 사정없이 사가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전역도 아니고 세계도 아니고 딱 사가현만 공격합니다. 엑스포 현장을 비롯해 사가현 일대는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계인에 대응할 마땅한 수단이 없어 사가현민들은 물론 일본 정부도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사람이 아닌 좀비로 이뤄진 아이돌 그룹 프랑슈슈가 이러쿵저러쿵 하다보니 외계인 침략자에 맞서는 선봉장이 됩니다.
하지만 결코 순탄할 수가 없죠. 본래는 TV 시리즈에서 주인공이어도 조연급 분량을 가진 캐릭터가 우연한 계기로 갑자기 캐릭터성이 변신하며 본 작품의 주인공급 위치에 오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고난과 해프닝을 거치며 똘똘 뭉쳤던 프랑슈슈에도 균열이 발생합니다. 그 사이 외계인들은 점차 남은 인간들을 향해 몰려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프랑슈슈는 갈라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그러면서 사가현을 비롯해 지구를 구하기 위한 특별 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이래저래 TV 시리즈에서는 주로 좀비물과 같은 호러 영화의 패러디가 주를 이뤘다면, 이번에는 극장판인 만큼 좀 더 힘을 주어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외계인 침공’을 다룬 SF 작품 전반을 패러디했습니다. 그냥 대충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우주선부터 외계인들의 모습,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그 위력과 피해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꽤나 디테일한 묘사들이 담겨 있습니다. 패러디의 속성이 강하다 보니 오리지널리티가 마냥 높은 건 아니고 자세히 따져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들이긴 하지만,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미지의 침략자와 맞서는 지구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꽤나 흥미로울 연출의 연속입니다.
여기에 한편으로는 사가현이 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외계인의 침공을 받는다는 부분이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사가 우주 엑스포’의 원본인 ‘2025 오사카 간사이 엑스포’에 개최 직전까지 제기되었던 불안 요소, 또는 외부에 대한 불안감을 상정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극장판에 맞춰 스케일을 높이기 위해서 도입을 했다고 보기에는 침공과 전투의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한 점이 있은니까요. 물론 정말 마구 달려갔던 TV 애니메이션처럼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습니다.
강화된 위기 상황에 맞춰 프랑슈슈의 멤버들, 그리고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 묘사도 두터워졌습니다. 관계의 허들도 높아졌습니다. 자칫하면 큰 피해를 잃거나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의 진정한 정체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부활한 좀비라는 점을 여전히 들켜서는 안 되요. 그런 와중에 이 심대한 위기는 프랑슈슈의 멤버들 사이에도 크고 작은 변화를 낳고, 이들은 프랑슈슈가 깨지지 않고 결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TV 애니메이션에 있었던 호러 장르 기반의 코드, 가벼운 코미디 분위기도 여전합니다. 정말 따로 놀기 좋은 요소들의 총체인데, 각본과 연출은 이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어느 하나가 쉽게 붕뜨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르 코드의 삽입 자체가 다소 갑작스럽다거나, TV 애니메이션을 안 본 사람들은 살짝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있어도 그래도 이런 류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친절한 편입니다. <귀멸의 칼날> 극장판 같은 작품은 이전 내용을 아는 것을 전제로 대체 어떤 상황인지 설명도 안 하고 관련된 장치도 없지만, <좀비 랜드 사가 : 유메긴가 파라다이스>는 좀 짧긴 해도 설명을 착실하게 해주니까요.
이와 함께 애니메이팅 퀄리티도 올라갔어요. 원래 MAPPA의 장기였던 2D 애니메이션은 극장판으로 작품이 만들어지며 제작 시간과 제작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던 덕분인지 정말 유려한 수준으로 원화와 동화, 각종 이펙트가 제작돠었습니다. 심지어는 TV 애니메이션에서 살짝 어색한 부분이 있던 3D 연출의 퀄리티도 상승했습니다. 상당수를 MAPPA에서 직접 제작했는데, 전후의 2D 연출과 큰 갭이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밴 같은 움직이는 사물, 대규모로 몰려들어 공격하는 외계인들, 외계인들이 지구까지 타고 온 각종 우주선, 그리고 클라이맥스로 펼쳐지는 프랑슈슈의 공연이 3D로 처리되어 있어서 3D에 할당된 분량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퀄티리가 큰 낙차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유려한 움직임과 대규모 오브젝트의 동작 표현에 유리한 3D 작업을 어떻게 2D 셀 애니메이션과 갭이 없이 병립하여 연출할 수 있을지에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고민한 움직임이 끝내 이렇게 실현되는 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러면서도 작품의 또 다른 목적인 사가현 홍보에도 충실한 건 물론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코드나 감수성 자체가 안 맞으면 보기 힘듭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각종 영상물에서 클리셰처럼 나오는 일본 스타일의 아이돌, 또는 젊은 여성을 표현하는 정서나 감각이 맞지 않으면, 느닷없이 여기저기서 마구 출몰하는 코미디의 감각이 어색하면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들이 어떤 점에서는 비판 요소라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애니메이션에서 <좀비 랜드 사가>가 들었던 호평처럼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끌어모아 변주가 강해도 정석적인 이야기로 감동을 끌어내는 흐름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도 여성(또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이)인 사람에게 가해지고 요구되는 역할에 대한 야야기를 삽입하는 것도 상기할 부분입니다. 이래저래 <좀비 랜드 사가>는 이번 극장판을 통해, 기획과 시놉시스로만 보면 주체할 수 없이 막나가는 시도가 준수한 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유종의 미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