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훤, <오, 발렌타인> 단평 : 회고를 넘어.

2004년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박일수의 죽음, 그리고 20년 후.

by 성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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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고, 영광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노동 운동이나 사회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좋은 순간으로만 가득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의미로는 병폐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무리 과거에 찬란한 순간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상황이 결코 밝지 않으면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그저 좋았던 순간을 회고하며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기도 쉽습니다.


사진가이자 다큐멘터리 연출자로 활동하는 홍진훤은 이에 주목을 하는 창작자입니다. 본래 고정된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다양한 투쟁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사진에 담겨진 맥락이나 프레임 바깥의 흐름들을 주목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습니다. 다큐멘터리 연출자로서의 홍진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 작품이었던 <멜팅 아이스크림>(2021)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창고에서 발견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필름의 복원 과정과, 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지도층에 오른 세계의 투쟁을 교차하며 맥락을 만드는 작품이었으니까요.


그의 최신 장편 다큐멘터리이자 홍진훤의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개봉 과정을 밟게 된 <오, 발렌타인>도 홍진훤이 그간 해왔던 작품의 결을 거의 그대로 따라 갑니다. 본래 개봉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홍진훤의 말대로 작품은 마치 미술관이나 실험 영화제에서 볼 법한 시도를 담기도 합니다. 스크린에서 화면이 단일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상이 좌우에서 동시에 흐르는 ‘2채널’로 작업된 것도 그 단면이라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또 완전히 내부에만 침잠하지는 않습니다. 영화제 상영판을 보지 못해서 개봉판이 얼마나 조정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대중적인 면모를 신경썼다고 볼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제 자체가 부산 한진중공업 조선소에서 김주익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 다시 그 다음 해 분신 자살로 세상을 떠난 울산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이자 사내하청지회의 조합원이었던 박일수의 이야기니까요. 박일수는 2004년 2월 14일에 세상을 떠났고, 사망한 날이 공교롭게도 발렌타인 데이였던 것이 제목에 반영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회고’ 경향이 강한 작품은 누구를 회고하더라도 대개 뭔가 좋은 분위기로 흐르기 쉽습니다. 작품은 쉽게 박일수를 회고하면서 안온한 분위기로 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불온함’이라 부르는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작품의 두 화자인 우창수와 조성웅은 딱히 좋게 좋게 이 죽음을 기억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창수는 경남 지역의 노동자이자 <기계를 멈춰> 같은 민중가요를 만들며 노래 운동을 해오다, 지금은 창녕 우포늪 부근에서 어린이 대상으로 사회 참여적인 합창단을 하고 있습니다. 생태 보호 운동도 하고, 청소년 인권에도 관심을 가지고, 다큐멘터리 중간에는 미얀마 민중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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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화자 조성웅은 박일수가 있었던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의 노조 위원장이었던 사람입니다. 동시에 시인이기도 해요. 주로 노동에 대한 시를 집필하는 작가입니다. 작중에는 안 나오지만 원래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며 대학에서 문학을 배운 사람이고, 박영근작품상 같은 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23년 조혜영 시인이 시 <미투>를 통해서 박영근의 등단을 대가로 한 금전과 성상납 요구가 폭로되자 이 상을 2024년 반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왜 조성웅이 이러한 문제에 민감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조성웅은 박일수와 노조 결성 때부터 같이 운동했던 사람이고, 우창수 역시 2004년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투쟁 때 같이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우창수는 물론, 조성웅은 박일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를 받을 정도로 무척이나 각별했던 관계이죠. 그러기에 둘은 박일수의 죽음을 여전히 쉽게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그의 사망은 죽음으로서 자본에 저항하는 이상을 넘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훨씬 심했던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하청 노동자와의 갈등하고도 이어져 있습니다. 둘은 상당히 강경한 어조로, 날카롭고 직설적인 언급으로 박일수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요인 중 하나에는 이미 관료화되며 굳어지던 주류 노동 운동이 있다며 강한 비판을 쏟아 냅니다. 그저 금속노조 산하의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가 제대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수준을 넘어 정규직 노조가 저지른 온갖 추태들을 헤집고, 1998년 민주노총이 합법화를 대가로 파견법과 정리해고법을 통과시켰다거나 투쟁 당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노동 투쟁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음 등을 계속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누군가에겐 무척이나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홍진훤이 두 명의 인터뷰를 최대한 가감 없이 실어내고, 이 둘이 보내준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가 사내하청지회를 탄압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제법 잘 드러나고 있어서 정말 울산에서 운동을 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을 사람들은 이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을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같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남성-생산직-정규직 조합원이 IMF 시기 자신들의 생존을 대가로 여성-식당 노동자의 비정규직화에 동의한 사건을 비판한 임인애, 서은주 연출, 라넷 제작의 <밥·꽃·양>이나, 비슷하게 노조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 볼 생각이 없었음을 통렬하게 지적한 김미례의 <외박>과도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경향성의 독립 다큐멘터리 작품에서는 어찌 보면 유일하게 개봉을 한 작품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홍진훤은 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도, 모두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2채널의 영상 연출은 이들의 목소리가 어떤 순간에는 소중한 동지를 안타깝게 떠나 보내면서 발생한 정념으로, 그리고 그 정념에 헤어 나오지 못하며 묶인 결과물이 아닌가를 넌지시 보여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창수와 조성웅의 말이 서로를 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작품 속에서 우창수와 조성웅은 실제로든, 연출 상으로든 서로 마주보지 않습니다.) 작품은 이 둘의 주장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따지는 대신, 왜 이러한 말들이 박일수가 세상을 떠난지 20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서 박일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나오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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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이 죽은 이후의 한진중공업도 그랬지만, 박일수가 죽은 이후의 현대중공업도 딱히 유의미한 변화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죽었지만 자본도 정부도 꿈쩍하지 않았고, 노조 역시 깊게 반성하지 않습니다. 홍보 자료에서 대놓고 ‘실패한 투쟁’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홍진훤이 그간의 작업에서 역사를 쉽게 박제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실패를 실패로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무엇이 병폐를 만들고, 운동이 지리멸렬하도록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때의 상흔이 어떻게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낳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회고가 그저 쉬운 말들로 그치지 않도록 작품은 한 발짝 물러서고, 한 쪽의 채널에는 인터뷰를, 다른 한 쪽의 채널에는 당대의 맥락을 드러내며 이어지는 또 다른 영상을 교차 배치하며 이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합니다.


이러한 작업들을 거쳐 홍진훤은 실패 이후의 상을 조망합니다. 실패가 곧 모든 것의 끝은 아닙니다. 아무리 망해서 잔해만 남았을지라도 우창수가 그랬고, 조성웅이 그랬듯 그간 걸어온 삶의 궤적은 일종의 실패를 맞이해도 또 다른 움직임을 만들게 합니다. 심지어는 그 움직임이 반쯤은 체념이나 환멸에 가까운 정서여도 말이죠. 그리고 그 말들을 서로 교차하고, 마치 역사를 다시 짚듯이 진중하게 접근하며 회고하는 말들에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시 묻는 것입니다. 마치 전방 입소 교육에 저항하며 분신으로 세상을 떠난 서울대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죽음을 회고하며 다층적인 역사 접근을 고민한 김응수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처럼, 상당히 논쟁적이고 날카롭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고민을 <오, 발렌타인>은 던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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