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상민 Nov 07. 2018

정가영 <밤치기> 단평 : 미러링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

발칙해 보이지만, 현실에 근간한 욕망의 사고 실험

최근 한국 독립영화에서 정가영은 무척이나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비치온더비치>로 느닷없는 장편 데뷔를 하기 전부터 꾸준히 영화를 찍어 자신의 유튜브 계정에 올린 꾸준함은 물론이거니와, 감독 자기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을 계속 찍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독특한 점은 여성으로써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영화에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성별구도를 역전시키는 ‘미러링’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구도를 바꾸더라도 정가영은 여전히 자신의 캐릭터가 한국 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인식합니다. 분명 정가영 영화 속 캐릭터 ‘정가영’은 극적으로 남성에게 대쉬를 하고, 성적인 접근을 시도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괴리와 간극에 부딛칩니다. 얼핏 보기엔 자극적인 설정의 연속이지만, 정작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정체성의 충돌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밤치기>는 <비치온더비치>에 이은 정가영의 두 번째 장편이자, 전작보다는 스케일이 좀 더 커진 영화입니다. (레진엔터테인먼트와 NEW 계열의 콘텐츠판다로 투자를 받았습니다.) 여전히 주연 배우는 세 명이고, 공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공간의 폭이 늘어나며 이야기도 확장됩니다.

주연 ‘정가영’은 영화 제작을 위한 자료 조사를 핑계로 선배 ‘진혁’(박종환)을 처음에선 술집에서, 그 다음에는 룸카페로 끌고가 노골적으로 성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처음에는 성별 구도가 역전된 듯 부끄럽게 답하는 진혁이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맞습니다. 계속 던지는 가영의 수위 높은 질문과 대쉬는 결국 기존의 성별 구도와 ‘나이’ 관계로 인해 가영이 원하는 답을 만들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가영은 계속 진혁과 함께 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책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별역전이 의미를 낳지 못합니다. 도리어 진혁의 선배 ‘영찬’(형슬우)이 난입하며, 평소의 젠더 관계에서 자주 발생하는 ‘뻐꾸기’가 가영에게 쏟아질 따름이죠.

홍보 자체는 가영이 진혁에게 던지는 성적인 말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은 핑퐁처럼 쉴 틈 없이 주고 받는 말 속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구도입니다. ‘영화 감독’과 ‘취재 대상’의 상하 관계를 바탕으로 가영은 ‘한국 남자’들이 주로 할 법한 성적인 어필을 진혁에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진혁이 이를 계속 회피하며 어렵게 만든 상하의 구도가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현실에서 볼 법한 여-남의 관계처럼 쉽게 균형추가 한 쪽에게 쏠리는 구도가 다시 재현되죠. 마치 이전에 만든 장편이었던 <비치온더비치>에서 주인공이 맞이했던 길처럼, 아무리 여자가 ‘비치’가 될지라도 결말은 남성들을 위한 성적 익스플로이테이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숨겨진 성차가 드러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 캐릭터는 무척이나 욕망을 숨기지 않지만, 결국 어떤 순간에서는 욕망을 펼치지 못한채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도 피하게 싶어했던 기존의 구도 안에 다시 놓이게 되는 것이죠. 이런 ‘재역전’ 속에서 정가영은 욕망을 투사하면서도 현실을 피하지 않고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면모가 정가영의 작품을 단순한 ‘미러링’을 넘어, 구조가 그대로인 가운데 ‘미러링’이 벌어질 경우를 사고 실험하는 흥미로운 결과물로 만듭니다. 그간의 작품들이 모두 정가영 자기 자신이 주연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를 쌓는 독특한 감각은 흔히들 정가영과 비슷하다 이야기하는 홍상수나, 이광국과는 다른 감각이 있기에 언젠가는 자신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색다른 질감의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을까요. <풀잎들>과 함께, 대화의 연속으로 흥미를 만드는 올해 나온 몇 안 되는 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노규엽 <출국> 단평 : B급 스릴러도 되지 못한 국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