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훈 Dec 04. 2024

계엄령

2024. 12. 4.

2024년 12월 3일은 역사상 가장 허무하게 끝난 계엄의 날로 기억될 것 같다. 


어제 윤석열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에 대한 위험성을 바탕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선포 내용 어디에도 민주당이 직접적으로 북한과 내통했는지, 어떻게 국가 전복을 꿰했는지에 대해서는 초라하다 싶을 만큼 부족한 명분뿐이었다. 


계엄 선포의 전문을 읽어보면 주된 이유가 크게 지속된 탄핵으로 인해 행정부의 업무를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과 두 번째로 예산 삭감이다.(구체적으로 근거가 설명되지 않은 종북에 대한 내용은 근거로 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행정부의 업무가 지속된 탄핵 소추로 늘어진다고 해서 입법부를 군대가 진압하는 게 민주주의적 행동인가? 예산 삭감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출판과 결사, 시위의 자유 등을 모두 묶어버리는 계엄을 선포할 명분이 되는가? 


이러한 명분 없는 계엄은 비단 시민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켜주어야 하고, 협치를 해야 하는 여당 지도부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한동훈 국민의 힘 대표는 바로 계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이와 관련해 여당은 사전에 논의된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전부터 한동훈 대표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힘이 되어줄 여당에도 장악력과 협치력이 없음을 증명했고, 또한 이 과정에서 군의 통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주었다. 무능함의 결과는 심야 시간의 긴급 발표된 계엄령 치고는 초라하게 고작 6시간 정도 지난 새벽 4시경 계엄령을 취소하는 황당한 마무리로 치닫게 됐다. 


민주주의는 설령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과 주장이 있더라도 그 주장을 투표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 또한 초법적 존재를 견제하기 위해 각 기관은 서로를 견제하고, 힘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싸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총과 칼로 권력을 쟁취하는 방식이 아닌 오랜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답답해 보여도 인사 청문회를 통해 사람을 검증하고, 탄핵을 통해 부적절한 사람에 대해서는 추방을 요청하며, 사법 제도를 통해 절차에 따른 재판을 진행한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주장한 북한과 내통하여 나라를 전복시킬 위기였다면 그의 주장에는 그를 뒷받침할 많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작은 주장을 할 때는 근거의 크기가 작아도 되겠지만, 큰 주장을 할 때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아주 거대한 근거가 충분해야만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는 큰 주장에 비해 초라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가 어떤 시대적 정신과 국가적 위기를 느꼈던지 간에 국민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동시에 여당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대통령으로서 정치력은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앞으로 일어날 한국 사회 안팎에 큰 괴로움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 보수는 대통령과 선을 그었고, 거의 대부분의 보수 단체, 보수 정당, 지도부, 미디어, 언론까지도 대통령 편에 서는 이가 없다. 진보 쪽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탄핵이라는 무기를 그전까지는 공포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실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탄핵의 실탄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가져다준 셈이다.


정치적 자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깎아내린 치욕스러운 행동이기도 했다. 민주 사회에서 계엄이라는 것은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거나 국가가 전복될 위기 등에 사용되어야 하는 최후의 카드이다. 그가 말한 대로 민주당이 종북세력으로 국가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면, 증거물로 야당 지도부에 북한 김 씨 일가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들과 내통한 수년간의 기록 등이 나오고, 그들이 전복을 위해 무기를 따로 들여오고 있는 등의 증거는 나와야 할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러한 최악의 상황은 또다시 탄핵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부끄러운 결과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탄핵이 설령 되지 않더라도 그의 위상과 정치적 생명력은 심각한 레임덕으로 재기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 여당과도, 야당과도, 미디어와도, 여러 정치 세력과도, 심지어 사법부와도, 군에 대한 통제력도 모두 증명하지 못했다. 한국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이 와중에 그의 어처구니없는 자책골은 한국이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초라한 사진과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