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날 것의 칼

2025. 3. 21.

by 한상훈

피상적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흉기 또는 번개탄과 같이 도구를 마주한 죽음은 궤를 달리한다. 아무리 극단적으로 괴로울지라도 그것은 정신의 영역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손목을 긋기 위해 칼을 보면 칼에서 느껴지는 본능적 공포가 생기며 목을 매달기 위해 끈을 준비하면 끈이 버틸 수 있는 구조물과 끈의 느낌, 그것이 목에 닿아 숨이 끊어져갈 때의 고통이 체감된다. 굳이 실행하지 않더라도 그저 목에 둘러만 봐도 알 수 있는 실체적 공포인 것이다. 그만큼이나 스스로의 생명을 없애는 일은 지독하게도 슬픈 일이고 지독하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매일 40명.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40명이 그렇게 떠나간다. 이것은 통계라 1년으로 비유하면 365일간 1만 4천6백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것이다. 약 30분이 안 되는 시간마다 줄을 서서 죽는 것과 같다. 오늘 죽지 못한 사람은 내일 죽거나 그다음 주에 죽거나. 그만큼이나 끔찍한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실행에 옮기진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사회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며 성장한다. 이 균형이라는 것이 꼭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한 균형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가 한쪽으로 거대하게 몰리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난해져야 한다. 미국은 이제 전체 소비의 50%를 상위 10%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은 말해 뭐 하겠는가. 중국에서의 대졸자들은 100만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에 그마저도 일자리가 없어 탕핑족으로 누워버리는 상황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이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으며 생존 수단이 없는 상황에 몰려도 거대한 부를 지닌 부자들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누군가가 헐값에 일해준 것으로 누군가는 영원히 노동에서 자유를 얻는다. 이것이 인류가 만들어낸 현존의 시스템이지만 만약 이 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임계점을 넘어 붕괴할 것만 같다.


마치 과부하가 걸린 기계처럼, 사회는 시뻘겋게 달아 올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들은 누가 죽인 사람들일까. 이들은 고통을 주는 타인을 사살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죽이는 선택을 한 이들이다. 한 통계에서는 자살률과 타살의 비율을 조사하기도 했었다. 타살을 안 하는 이들. 즉 타인에게 고통을 받아 괴로운 상황에 놓이는 이들이 타인을 도리어 죽여 범죄자로 살기보다는 스스로를 죽이는 선택을 하는 비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도대체 누가 죽어야 할까. 악인들은 도통 쉽게 죽지 않으며 자신이 죽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죽인다. 이 사회는 그러한 죽음에 침묵하고 겁쟁이처럼 도망친다. 이미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의문스러운 죽음이 줄기차게 따라붙는 인물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법의 심판 위에 있고 사법 시스템 위에서 유유자적 살아간다. 한 명의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선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많은 과부하를 견뎌야 하는가. 잘못된 사회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의 모든 게 쥐어짜지고 결국 남은 것 하나 없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누구의 탓인가.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개개인들의 탓인가.


피상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이들은 실제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고독사한 시체에서 나는 냄새와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애썼던 그 긴 기간들. 돈이 없어 라면도 아껴먹으며 살아보려 애쓴 이들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보지 않고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 외롭고 긴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고 알 수 있을까. 텅 빈 방. 난방도 없이 추위에 떨며 사는 이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 이들을 그저 사회의 패배자들, 무능하고 게으른 인간들이라고 싸잡아서 통째로 비난하면 그것이 옳은 사회가 해야 할 일일까.


물론 사회는 모든 개인을 구원해 줄 만큼 효과적으로 동작하지도 않고, 인간 개개인이 가진 이기심에 근거해 모든 조직과 시스템이 작동된다. 그러니 돈 되고 멋지고 잘나 보이는 것들에는 모두가 열광하며.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일들은 누군가가 신념을 가지고 돌보지 않는 한. 개선되지 않는다. 마치 쓰레기통을 관리해야 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기 바쁘기에 파티에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쓰레기통엔 오물이 가득 찬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술과 음식에 취한 이들 앞에서 쓰레기통을 누군가는 비워야 한다고 소리쳐봐야 누가 선 듯 쓰레기봉투를 처리할까.


만약 사회가 위험에 더 노출된다면. 파티의 음악이 끝나고. 모두가 다 못 사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러면 나아질까.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서 쓰레기통이 넘쳐 파티장을 완전히 뒤덮어 춤출 수 있는 곳이 없어져야만 그때서야 바뀔까.


언제 산지도 모르는 흐리멍덩한 불빛 속에서 꿈을 찾아 공부하는 어린아이와 그런 어린아이를 어떻게든 가르치려는 부모님들도 우리 사회엔 있고,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텅 빈 방에 놓인 독거노인들도 우리 사회엔 있고,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아이들도 우리 사회엔 있다. 일을 해보고 싶어도 아무 곳에서도 뽑아주지 않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잘못된 시스템의 임계점에 놓인 것처럼. 과부하 된 쇳덩이의 부품처럼. 그렇게 사회에서 개인으로 퍼져가는 스트레스를 모두가 느끼고 있다. 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 위해 더 많은 자극과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유흥에 집중해 봤자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같이 잘 살아야 한다. 아주 조금만 나누면 된다. 아주 가끔이라도 홀로 지내는 이웃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돈 걱정 할 필요 없을 만큼 많은 이들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희생을 위해 사용한다면.


아마도 그것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해 줄까. 물론 기억해주지도 않고 오히려 악인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정말 옳은 길이라면. 신은 그 길을 옳게 봐주시지 않을까. 신이 있기를 원한다. 아비규환 같은 생지옥의 세상이지만 옳은 길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잘하고 있다."라고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 이 세상이 그저 한 번 살고 가는 유한한 곳이 아니길. 이곳에서의 기록이 영원히 남아 공정한 신의 공정한 심판을 받길. 그 심판으로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벌을 받아야 할 이들을 벌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줌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