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7.
곱게 자란 이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써본 적이 있을까. 흙이야 말로 가난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흙수저라는 말곱게 자란 이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써본 적이 있을까. 흙은 언제부턴가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 '흙수저'라는 말처럼. 수저 하나도 제대로 갖지 못한 삶, 흙으로 만든 수저로 밥을 뜬다면, 그 밥에는 흙이 섞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이, 흙을 삼켜본 적 없는 이들의 삶과 같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사실이 몹시 화가 났다. 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대부분의 인간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일부러 지켜보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신의 상상 속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고통을 전제로 한다.
릭 워렌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책을 깊게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목적을 말해도, 절대적인 비참함을 정당화하긴 어렵다. 흙바닥에서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를 기르는 나라가 얼마나 많을까. 태어나자마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엄마, 아빠 소리 한 번 못 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삶의 목적 이전에, 삶의 정당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삶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매우 평등하고 정의로운 어떤 기준으로. 그렇지 않다면 선한 신과 전지한 신은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본 기독교의 모순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여전히 '원죄'라는 오래된 틀에 갇혀 있다. 마르틴 루터가 개혁을 했을 때, 그의 모든 주장이 과연 옳았을까? 타락한 종교의 이름 아래 빠져나온 그 길도 또 다른 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 틀 안에서 생각하는 법만 배웠고, 틀 밖을 보는 시도는 점점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편의점보다 많은 교회들 사이에서, 병신 같은 목사들이 월급 한 푼 벌어보려 발버둥치는 현실뿐이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무렵, 10년 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사업은 접고 NGO에 들어가거나 월급쟁이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사업의 10년 차에 해당한다. 나는 성공했을까. 아니면 완전히 실패했을까.
때로는 모든 것들 다 버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 따르는 곳으로 나아가보고 싶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을까. 영혼이 원했던 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안위였을까. 흙먼지가 눈앞을 가리고, 흙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을 보고 나는 신께 기도했었다. 이들을 살리고 싶다고. 그리고 궁금했었다. 왜 아무도 이들을 구하지 않는지. 도대체 그 많은 신앙인들과 종교인들이 수십억 명씩 된다는데. 왜 여전히 세상은 이토록 흙먼지 속에 죽어가는 이들이 많은 것인가.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선교회에 있으면서 작은 구제를 보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를 나눠 배고픈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들이었다. 나는 그것도 좋지만 그것을 목표로 삼아선 안된다고 믿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는 1명을 구하는 것이 신이 원했던 것이라면, 모두가 그렇게만 해서는 숫자가 안 맞는다. 세상엔 절체절명에 놓인 사람이 수억 명. 이들은 언제, 누가 살리는가. 진정한 선교를 위해선 1명을 살리는 목표로 살아선 안 됐고, 100명, 1000명, 1만 명, 10만 명, 100만 명, 천만명, 1억 명, 10억 명.
누군가는 큰 구제를 해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번 것을 나누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신에게 요구했다. 그 방법이 뭔진 모르겠지만 한 번 써달라고. 내가 저기 죽어가는 사람들을 트럭으로 실어 살려볼 테니. 힘과 지혜를 달라고. 그런데 도저히 나는 모르겠다고. 나는 도저히 왜 이 세상을 이모양으로 신이 만든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기존의 교리와 가르침 속엔 해답이 전혀 없었다. 그 누구도 해답이 없었다.
언젠가 내가 힘이 생긴다면, 항상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다. 척박한 어느 땅에 가서 운동장과 학교를 지어두고. 그곳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그곳에서 적어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값 없이 받았으니 값 없이 주어라. 생명을 값 없이 받았으니 생명을 값 없이 주어라. 내가 거저로 받은 생명의 값을 그들에게도 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은 나처럼 삶을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누군가가 온전한 사랑을 전달한다면. 그 기억은 그에게 살아갈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사람은 단 한 사람의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사랑하는 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살 수 있다. 우리에겐 단 한 명이 없어서 끝난다. 위대한 삶도 하찮은 삶도 고작 그 한 명으로 뒤바뀐다. 거저 받은 삶. 허투루 쓰지 않는다면 이 삶은 어디에 써야 하는가. 1명을 살리는 수준으로 살 것인가. 10명을 살리는 수준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백만 명, 천만명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신은 누구에게 주목하고 있을까. 언제나 동일하다. 가장 낮고 천한 자. 나는 그가 가장 낮고 천한 자의 곁에서 무엇을 할까 궁금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아도, 성경 밖 깨달은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창조의 이유를 재미 이외의 것에서 찾을 수 없었고, 재미로 만들었다기엔 자녀들의 삶이 불행해도 너무도 불행하다. 그 어떤 부모가 불행한 자녀를 탄생시키기 위해 자녀를 낳을까. 불행을 이미 다 보고, 불행에서 구원할 힘이 있음에도 낳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만에 하나 인간의 부모라면 할 수 있어도 신을 부모로 여긴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뜻을 오래도 물었다. 참 오래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변곡점의 순간마다 아이러니한 일이 생기곤 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존재했다. 삶의 변곡점의 순간들이 마치 어린 시절 배포 좋게 신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나를 이용해서 그 사람들을 구해보세요. 나처럼 살기 싫어하는 사람을 통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벌써 그 기도를 한지도 20년이 돼 간다. 기꺼이 흙을 마시러 가고 싶었다. 양복 입은 샌님들이 싫었다. 백억, 천억이 손에 쥐어져도 사랑을 베풀 수 없는 거세된 인간들과는 엮이기 싫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인간이 동물과 같이 종족 번식과 먹이, 편안함, 쾌락만 따른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영성이 거세된 인간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 단 한 톨의 영성이라도 살아있다면 그와는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언젠가 모두가 세상을 떠나 진실을 목도할 순간이 다가올 텐데. 그때 나는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전한 사랑만큼 친구도 많겠지. 내가 아낀 이들의 숫자만큼 내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겠지. 비록 이곳에서는 사랑을 전했어도 받지 못하고 오해한 이들도 그곳에서는 진실을 볼 수 있겠지. 그것으로 족하다. 이 순간은 짧게 지나갈 뿐. 고작 수년의 고통. 수년의 아픔. 그것이 지나면 영원한 세계가 있겠지.
이 세계에는 왕이라 불리는 자들이 온몸에 주렁주렁 금붙이를 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우스웠다.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강요하고, 법으로 만들어두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좋은 음식과 좋은 옷. 사치스러운 금 쪼가리들로 아무리 겉을 채워도 그들은 산송장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신이어도 그런 인간들 곁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전능자의 시선에서 얼마나 하찮겠는가. 짧은 시절을 살고 가는 꽃 같은 인간이 온갖 권위를 이용해 자신을 신성시하고, 금붙이로 꾸미기에 급급하니.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왕권과 그들의 수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 그들이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까. 불타 없어질 유산이 아닌 영원한 세계로 가저갈 유산이 무엇이 있겠는가.
손에 흙이 묻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 가장 큰 영광이 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른다. 빛이 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수백만 원의 피부 관리를 매주, 매달 받는 연예인들인가. 아니면 외로운 이들을 찾아가 사랑을 전했던 이들인가. 차갑고 주름진.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삶을 응원해 주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거대한 빛은 그런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남겼다."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적게 받은 자에게 적은 것을 요구한다." 대단한 재능과 아름다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거대한 부를 이룬 이들은 많이 받은 자들이다.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신도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 재능, 아름다움, 부, 지식, 인맥, 권력을 누구를 위해 왜 사용했는가. 모조리 다 자신의 주머니와 치장에 꾸민 이들은 아무것도 남길 유산이 없다. 그들이 남길 유산이 없다.
어쩌면 대부분의 가진 인간들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부패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했던 게 아닐까. 영원한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면, 현실에서 부자로 100년을 살아도 그곳에선 아무것도 없어 영원한 초라함으로 살아갈 것이다. 반면 아무것도 없이 하루하루를 전전하던 이들이 남긴 사랑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찬란하게 남았을 것이다. 영원한 상급. 그것이 없다면 이 모든 세계와 신앙은 성립될 수 없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명제로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배팅을 한 도박꾼일지도 모른다. 그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서 선함을 택한 것이라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기엔 이후를 생각할 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을 먹어야 하는 곳. 척박한 땅을 누군가는 개간하고, 물을 주어 싹을 틔워야 하는 세상. 기약 없는 죽음 뒤를 위해 모든 걸 건 사람이라면 그 값을 인정받아도 족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만약 그곳에 가게 된다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이들이 가장 위대한 이들이라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빛난 적이 없지만 자신보다도 더 큰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이들일 것이다. 정의롭고 공정한 신은 절대 평가가 아닌 사람마다 받은 것으로 평가했다. 가난한 자가 낸 천 원이 부자가 낸 만원보다 크다. 누군가에겐 천 원이 전재산이 되고, 누군가에겐 천 원은 화장실 종이로 써도 될 만큼 하찮다. 공정한 신은 모두 다른 기준으로 평가한다.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베푼 것인지. 100에서 1을 준 것인지. 10000에서 1을 준 것인지.
나는 그가 있는 곳에 가고 싶다. 답을 듣고 싶다기 보단 그가 봤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나도 보고 싶다. 이 모든 죽음을 보면서까지 꼭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그는 어떤 모습을 기대했기에 이 세상을 창조했을까. 흙에서 시작된 모든 창조물이 다 흙으로 돌아간다. 너도. 나도. 모두 다. 그 후에 새롭게 시작된다. 진짜 삶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