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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악몽을 기록하는 이유

2025. 3. 28.

by 한상훈


녹음된 수많은 꿈 기록

인상적인 꿈을 꿀 때마다 꼭 녹음기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벌써 10년쯤 된 습관이다. 이유는 대학생 시절 나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려 왔다.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학생인 나는 고등학교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연히 대학생인데 고등학교에 있는 것도 이상하고, 수능을 다시 봐야 한다면 더 높은 학교를 위해서일 뿐이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고등학교에 있을 필요는 없다. 재수를 하는 경우에 해당하니까. 그런데 지독하게도 꿈에선 고등학교로 끌려가서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었다. 도대체 얼마나 이 꿈을 반복해서 꾼 것인지 모든 레퍼토리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이 꿈이 그저 며칠간의 악몽이었다면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꿈은 몇 년 가까이 이유를 불문하고 나타났다. 대학을 입학해서도 졸업해서도. 휴학 중일 때도. 심지어 군대에서도. 이 꿈이 사라진 건 서울로 올라와 CTO로 일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전까지는 도통 이 멍청한 악몽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반복적인 꿈을 꿀 때마다 점점 선명도가 높아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사건과 장면이 구체적으로 완성된다. 마치 내가 전생에 경험했던 것일까. 아니면 평행 우주 같은 곳에서 있었던 일을 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반복적이고 약간의 변조만이 존재하는 이상한 꿈의 세계였다.


끝없이 고등학교로 끌려가는 꿈도 있지만 수영선수가 된 꿈도 있었다. 그 꿈에서 나와 친구들은 잘 나가는 수영 선수였다. 아마 메달도 곧잘 따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키가 크고 몸이 거대했다. 친구들과 모임을 가지면 술자리에 데려오는 여자친구가 수없이 바뀌고, 집은 잘 살았는지 깽판을 치고도 감옥에 가지 않고 곧잘 돌아와 떠드는 친구들이었다. 그 꿈에서 나는 이상한 사건들을 경험했다. 수영 모임을 위해 단체로 가던 트럭이 급비탈에서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 앞을 보니 어린 개들이 길 앞에 겁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운전자는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가 강아지들을 쫓았다. 그러자 강아지는 조금씩 자리를 움직였고, 급비탈의 운전사는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풀며 내려왔다.


그러던 중 차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건지 비탈길을 쭉 미끄러졌다. 차는 한 건물 벽면에 들이박았고, 그때 생긴 충격으로 차량은 불타기 시작했다. 운전사였던 친구는 불이 나서 차가 폭파하기 전에 밖에 나왔지만 안에 있던 수십 명은 미처 나오지 못하고 불에 탔다. 그중에 몇몇 과거에 내가 한 여자애만 그 불길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눈앞에서 모임 사람들 수십 명이 불에 타서 죽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브레이크 고장으로 사고를 낸 친구는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반면 나는 불길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애를 만났다. 정확히는 가지고 놀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의 나는 갈 때까지 간 인간 막장이었나 보다. 그 여자애의 가족은 차에 차고 있었는데 그 사건으로 모두 불에 타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의 사건이 의도된 사건이었던 것 같다. 왜냐면 우리 막장 친구들을 노리고 공격해 오는 일들이 계속 발생했다. 꿈에서 깰 때면 염산가스에 노출되어 숨을 쉴 수 없어 집 밖으로 뛰쳐나가며 깨곤 한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노리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숨을 쉬기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안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그때 다 죽었을까.


법원 앞에서 또 빠져나올 친구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 사이를 못 참고 또 인간 말종 짓을 하고 있었다. 법원의 힘 좀 쓴다는 또 다른 친구는 법원에서 나와 우리들에게 질타했다. "너희는 그 짧은 틈도 못 참냐"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 꿈을 꿀 때면 이질감을 느낀다. 왜냐면 급비탈에 들어가기 직전 차가 멈추는 건물에 대한 꿈도 과거에 꾸었고, 그 건물이 어떤 목적인지도 과거에 꾼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꽤 많이 다니는 인기 좋은 조용한 카페 거리 같은 곳에 카페 겸 공방 겸 집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나는 그 건물을 좋아했나 보다. 집을 사고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었다.


점점 더 짜 맞춰져 가듯 어떤 순간을 구성해 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래서 부질없다는 걸 알지만 매일 잠에서 깨면 5분에서 10분 녹음기를 켜고 녹음을 한다. 이것이 혹시 전생일까. 전생의 죄가 그랬다면 정말 나는 벌 좀 받긴 해야겠구나 싶을 정도로.


인생을 살면서 영혼이 기억하는 것처럼 끌리는 장소나 순간이 종종 있었다. 그곳이 첫 번째는 북촌이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아주 어린 시절 북촌 인근, 지금의 안국역 사거리에 사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셨던 고향 땅에 왔다는 걸 본능으로 알았던 걸까. 나는 여전히 북촌이 좋고, 북촌과 이어지는 인사동과 교동, 그리고 조금만 걸어서 가면 갈 수 있는 혜화동까지도. 그 인근길이 마치 내가 원래 있었던 곳인 것처럼 좋다.


꿈속의 장소도 그곳이었을까. 공방 겸 카페 겸 집으로 쓸만한 장소가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강북에 몇 곳을 제외하면 그런 장소를 기억하기 힘들다. 그곳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에 대한 꿈과 그곳에서 내가 친구들과 벌였던 멍청한 짓들에 대한 꿈을 기억하듯 꾼다. 학교로 끝없이 돌아가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악몽처럼 말이다.


단순한 악몽을 끝없이 반복하며 꾸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밖에 의미가 있는 것일지 나는 모른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알 방법은 없겠지. 그러나 꿈을 쭉 기록해 두면서 마치 타인의 삶을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된 것처럼. 꿈속을 탐험하고 조사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탁한 삶에서 소소한 낙이 있다면 악몽을 수사물로 바꾸어 그것을 즐기고 사유해 보는 셈이다. 어차피 꿀 찝찝한 악몽이라면. 쭉 펼쳐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기록해 두는 것이 즐겁다. 그곳에서 또 독특한 삶의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르지. 여기서 발견한 이야기를 이용해 소설을 쓰게 될지도. 아니면 그때 느꼈던 감정이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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