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확장된 자아

2025. 6. 18.

by 한상훈

사람들은 여러 조직에 속하며 자아를 확장한다. 조직에 대한 비판이 곧 나에 대한 비판이 되어 잘못된 것이 있어도 관대해지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다른 조직에서 일어났다면 비판할 일이 나의 조직이 되면 비판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된다.


사회 초년생 직장인을 생각해 보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기업에서 일하게 된 직장인. 다른 사람들이 회사에 대해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불편한 기분이 든다. 자신이 이제 막 일하게 된 기업. 기업의 과오에 자신이 기여한 바가 단 하나도 없지만 판단의 기준이 흔들린다. "이 정도까지 비판할 일이야?" 하면서 옹호하게 된다.


그러나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사람들이 비판하던 문제가 결국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이 오게 되면 그때는 확장된 자아가 다시 원래의 자아로 회귀한다. 회사에 대해 비판하게 되고, 회사를 떠나고 싶어지고,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회사 비판자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회사에 날 선 비판을 하게 되면 회사가 자신이라는 확장된 자아를 가진 동료들에겐 불편한 인간으로 찍히게 된다. 결국 문제의 회사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문제에 대해 우쭈쭈 하는 사람들만 남은 내로남불 조직으로 남게 된다.


왜 사회에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날까. 상식적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도 책임자가 옷 벗고 쫓겨나질 않을까. 왜 극단적 사상에 심취해 그들의 주장은 모조리 옳다고 판단할까. 자아를 상실하고 그들이 주입한 환경과 사상에 자아가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심각한 사이비 피해자를 보자. 사이비에 빠져 그들이 얻은 것은 거의 없다. 재산이 탕진 됐고, 인생은 낭비 됐다. 잃은 것은 선명하고 얻은 것은 거의 없다. 자신의 조직이 온갖 문제가 있다고 해도 쉬쉬하며 넘어간다. 어떤 논리를 내세워서라도 교주를 지키려 든다. 교주가 자신의 가해자임에도 교주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라는. 교주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이라는 감정이 들기에 보호하려 든다.


정치도 매우 유사하다. 나는 나의 정치적 성향을 단편적으로 말하는 편이 아니다. 정치의 스탠드를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경우에 이원화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좌파와 우파.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모든 가치관을 내가 꼭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 현시대는 매우 복잡하게 나눠진 주제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다. 경제, 사회, 문화, 이념, 안보, 인권... 그리고 각 이념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로 나눠진다.


그러나 판단력이 낮다면 이러한 모든 사안에 대해 판단을 위임하고 자아를 확장하여 사상에 동조한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 편인지와 남의 편인지. 아군인가 적군인가라는 초등학생 수준의 편 가르기 행태만 남는다. 안타깝게도 이런 초등학교 수준의 판단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끼지만 어쩌겠는가.


종교적 광기에 가깝게 정치에 빠지게 되면 아군의 잘못은 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정치인들은 정치 공학 측면에서라도 아군의 잘못을 때로는 모른척하고 상대를 비난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의 숙명이다. 반면 정치인을 평가하고 감시하며 그들에게 때로는 힘을 주고, 때로는 채찍을 주어야 할 시민 사회는 다르다. 언제나 한쪽 편의 모든 잘못을 덮고, 다른 쪽의 모든 잘못에는 비판한다면 그 모습이 어떻게 공정한 판단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종종 상식적이지 않은 판결을 하는 판사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정치에 빠진 이들은 몰상식한 판사보다도 더욱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곤 한다. 주어를 빼고 평가해야 한다. 주체가 누구인지 제외하고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동일한 죄를 지었는데 사람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면 그러한 판사는 너그럽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는가. 강한 힘을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약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한 생계형 범죄에 철퇴를 내리는 판사를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높은 위치의 인물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해야 한다. 반면 네 편 내 편으로 나뉜 이 시대에서는 내편의 기준과 네 편의 기준이 다르고, 이것을 당연하다 여긴다.


스스로 곧게 선 자라고 믿는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시험해 보라 권면했던 사도 바울의 편지가 기억난다. 주체를 역전했을 때도 나는 동일한 판단을 하겠는가. 주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때도 옹호하고 지지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은 자신을 정의하고 어떤 곳에 소속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 같다. 슬픈 일이다.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다면 생각을 해주는 이들의 생각에 기생하게 된다. 그들의 주장이 내 주장이 되고. 그들의 말이 내 말이 된 것처럼 착각하며. 안타깝지만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고 많은 순간 생각을 양보한 이들은 양보한 만큼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옳았을 때는 문제가 덜하겠지만 그들이 악해지기로 결심한다면 사이비 종교에 온 재산을 바치는 이들처럼 똑같이 이용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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