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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Nov 07. 2019

[에세이] 나는 못났지만 부끄럽지 않다

92년생 한상훈.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내 고향은 촌이다. 내 또래의 친구라곤 태어나서 10년 동안 1~2명이 전부였고, 마을에 들리는 소리라곤 개짖는 소리와 닭우는 소리 뿐이었다. 나는 어린시절에 꿈이 과일장수, 개장수 같은 거였는데 그럴수밖에 없던게 내가 아는 직업이라곤 과일장수, 개장수, 농부, 목수 4개가 끝이었기 때문이다. 촌에서 산다는건 이렇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유튜브를 보고, 세상에 온갖 일들이 펼쳐지는걸 알고 있지만 난 촌놈 그 자체였다.


촌에 있는 학교답게 반도 1개 뿐이었다. 전교생은 60~70명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매년 같은 친구들만 만난다는건 절대 행복한 일이 아니다. 친구들은 그나마 도시쪽에 사는 애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갔다. 반면 나는 할머니와 둘이 TV를 보면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친구도 없고, 말도 거의 못하시는 할머니와 10년 이상을 조용히 보낸 것이다.


중학생 때부턴 조금 달라졌다. 전교생이 몇 백명이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한 반에 40명 쯤되는게 11~12반 정도 됐던것 같다. 갑자기 넓은 세상으로 나오니 나는 굉장히 두려웠다. 아직도 중학교 입학식때가 기억나는데 촌구석에서 왔다보니 친구도 없었고, 친구들이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웠다. 왜냐면 혹시라도 친구가 "거기 완전 촌동네잔아." 하며 비웃을게 뻔했으니까.


내가 잘못한것도 없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아야했다. 우리 집은 솔직하게 가난한 편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브랜드 신발을 신어본적이 없었는데, 옆집 친구는 초등학생 때부터 브랜드 신발을 신고 다니는게 늘 부러웠다. 한번은 어머니가 사주신 만 오천원짜리 신발을 친구에게 자랑을 했던 적이 있다. 이건 그나마 시장티가 덜나고, 폼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는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그는 평생 4만원 밑의 운동화는 신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브랜드 신발을 산건 중 2때, 아식스 신발이었다. 그 신발은 6만원 정도 됐는데 어머니가 한나절 일해야 버실 수 있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그 신발을 사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자기 전 신지도 않고 침대 옆에 두고 잤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은 아식스 신발을 신고 갔을 때 친구들이 알아봐줬다는 것이다. 등교길에 "오 신발 샀네." 했던 말이 10년도 더 된 지금까지 선명하다.


나는 중학생 때 집에 가는게 무척 어려웠다. 집이 촌이다 보니 나가고 들어오는 버스가 2시간에 한 번정도 있었다. 그래서 3~4시에 수업이 끝나도 5시가 넘어야 오는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집까지 걸어서 오려면 2시간은 걸어야 했다. 5시에 오는 버스는 가끔씩 4시 50분에도 오고, 어쩔땐 5시 30분에도 오곤 했다. 매일 같이 눈이 빠져라 버스만 바라봐야 했던 날들이 3년이나 된다.


중 3땐 그나마 좀 달라졌다. 학교가 끝나면 서점에 들려 이런저런 책을 봤고, 친구들과 한참이나 걸어다녔다. 그러면서 5시까지 시간을 보낸 것이다. 친구들은 집까지 30분 ~ 1시간 남짓 걸어야 했는데 걔들 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버스가 오니 시간이 적절했다. 그렇게 나는 중학생 때도 학원도 다니지 않고, 걷고 기다리면서 삶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내가 게임에 빠지게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집에 오면 6시. 그때부터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집에 딱히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공부는 알아서하는 것이란 철학을 가지고 계셨기에 공부에 간섭도 없으셨다. 촌에 살다보니 주변에 친구도 없었고, 긴 저녁과 밤을 채운건 다름아닌 게임 뿐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모든 어른에게 증오의 대상인가보다. 나는 게임하다가 많이 혼나기도 했고, 공부를 안한다고도 많이 혼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공부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가 항상 내 곁엔 없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모두 알 것이다. 근묵자 흑이란 말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 삶이 이렇게 외롭고, 부모님 없이, 친구없이 자라다보니 내 친구들 역시 부모님 없이 자란 친구들이 많다. 나는 부모님은 계시지만 어린시절부터 10년 넘게 싸우시는 모습을 봐왔고, 내 친구들의 부모님은 한 분이 안 계시거나, 이혼했거나, 병을 가지고 계시거나, 심하게 다투는 사람들 뿐이었다.


내가 단 한 번도 '집안에 문제있는 사람들 모이자' 라고 한 적이 없었지만, 친해지고보면 다 같은 상처를 품은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도 이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어떤 친구는 트라우마로 힘들어하고, 어떤 친구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졌고, 어떤 친구는 가족을 잊었다.


내가 촌에 살았고, 우리 부모님은 초등학교 밖에 공부를 못배웠고, 집은 가난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태어나보니 그랬던 것이다. 태어나고 몇 년 후에 IMF가 터졌고, 힘들어진 가계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하게 다투고 사셨다. 덕분에 어머니는 새벽에 출근해 밤에 오셨고,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제대로된 아침과 저녁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3학년때까진 키가 작지 않았지만 이후로 키가 제대로 크지 않았다. 스트레스도 심각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고 있었고, 학교에서는 나를 놀림감으로 삼았다. 어린이들이 악랄한 점은 무리에서 조금만 약해도 바로 배척한다는 점인데, 키가 작아진 순간부터 나는 먹잇감이 된 것이다. 덕분에 3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심각하게 따돌림을 당했고, 내 얼굴에 침을 뱉거나 머리카락을 뽑던 애들도 있었다. 고작 한 반에 13명 남짓한 그곳에서 말이다.


나는 얼굴이 비대칭하기도 하다. 이유는 어린시절 껌을 먹던 것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집에 일찍와서 뭘 할까? 아무것도 할게 없고, 놀거리가 없으니 TV를 봤다. 아침과 저녁을 못먹었고, 수중에 용돈이라고 몇 백원있는걸로 사먹은게 껌이었다. 껌을 한쪽으로 씹다보니 턱이 휘고, 얼굴이 비대칭해졌다. 얼굴 비대칭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초등학교 6학년때 치과에 가니 교정으론 답이 없고, 성인되서 양악수술을 하라고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작은 키, 비대칭한 얼굴, 그로 인해 낮아진 소화력과 밥도 제대로 못먹어서 살도 잘 찌지 않는다. 어렸을 때 지방세포가 늘지 않으면 커서도 살이 잘 붙지 않는다. 누군가는 "살 안찐다니 정말 부러워요." 하지만 나는 "평범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간절하게 평범해지길 바란다.


중학생 때는 너무나 우울증이 심해졌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어쩌면 조커의 심정이 이런것일지 모른다. 작은 키, 마른 몸, 검은 피부, 기름진 머리, 적은 숱, 가는 머리카락, 가난한 집, 뒤틀린 얼굴. 누구라도 내일부터 이렇게 살라고 하면 좌절하지 않았을까? 난 중학생때 이렇게 살았고, 참 고통스러웠다.


내가 삶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건 희망을 찾았을 때다. 고등학교에 들어오고나서 공부를 배웠고, 운동을 시작했고, 사람들이 사랑해주고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학생때처럼 외로운 시간도 이젠 안녕. 강제로 야간 자율학습을 하면서 친구들과 하루종일 붙어있게 됐다. 적어도 외롭지 않았고, 적어도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는 주말에만 들을 수 있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중3때쯤 아버지는 대장암 수술을 하셨는데, 그때 이후로 부모님의 싸움이 줄어들었다.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어머니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많이 사그라드신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보너스로 살고 있지."라는 말을 하신다. 죽음의 문턱을 넘고 나신 후의 삶은 축복으로 여기시고 이전처럼 화를 내지 않으셨다.


다행히 나는 이후 꽤 잘 나갔다. 고등학교때 처음 '영어단어집'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고 1때부터 공부했지만 500점 만점에 수능 431점. 맞기 힘들다던 수리 가형 1등급도 맞았다. 내가 살던 평택시에 수리 가형 1등급은 몇년만에 나온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나만 그 해에 평택에서 1등급을 맞은건 아니었다. 수능은 내가 본 모든 시험중 가장 잘 본 성적이었다. 그리고 학교 전체에서도 가장 높은 총점이었다. 덕분에 졸업식때는 상과 장학금도 받았지만 장학금이라고 준 돈은 고작 10만원이었다.


고등학교때 나는 기흉 수술을 했다. 고3 6월 모의고사 쯤이었다. 기흉 수술로 보름동안 입원해있었고, 1달 가까이 학교를 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공부도 거의 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공부를 더 했더라면 점수가 더 올랐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건강이 나빠지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수술 이후 기흉과 함께 '결핵 의심'을 진단받고, 약을 먹었는데 이 약이 굉장히 끔찍했다. 약을 먹으면 오줌이 피처럼 나오는데, 학교에서 친구들이 내 오줌을 보기라도 하면 "너 오줌이 피색깔이야"하면서 아연실색했다. 그 뿐 아니라 약이 독해서 먹을수록 안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핵 의심' 환자였지만 대우는 '결핵' 환자로 받았기에 나는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서, 계속 내 상태를 보고해야했고, 이것도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한가지 좋은 점은 가끔씩 수업시간에 보건실로 산책하면서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공부를 즐길 수 있었고, 솔직하게는 정말 행복했다. 친구들과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으니 외롭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공부해서 점수가 팍팍 오르니 기가 살았다. 특히 선생님들이 나를 칭찬해줄 때는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는데, 지나다닐 때 "쟤가 한상훈이래."라면서 수근대는게 무척 기분이 좋았다.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 성적을 100점 이상 올리고, 전교 등수를 300등 이상 올린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이렇게 해피엔딩이면 좋았을텐데 삶은 꼭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가난한 집에서, 작은 키, 검은 피부, 뒤틀린 얼굴, 외로운 삶을 가진 사람이다. 삶의 형편은 나아지고, 내가 쌓아둔 것들도 늘어가고 있지만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삶은 무척이나 힘든 것이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건 엄청나게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나는 부모님을 원망했던 시간도 많고, 내 삶을 비관하고, 우울증으로 끝없이 추락하던 시간도 오랫동안 겪었다. 우울증이 심하면 온몸이 찢어질듯 아프고,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이 고통도 나는 오랫동안 겪어보았다. 하지만 울고, 울면서 깨달은건 운다고 바뀌는게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나만 울고 있을 뿐이다. 또한 나만큼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짐이 있다는걸 안다.


물론 사람마다 삶의 난이도. 레벨은 모두 다르다. 누구는 너무 쉽게 살아와서 흉터하나 없이 깨끗한 사람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본능적 거부감이 드는데, 그들의 평온함과 행복함, 사랑받고 자란 환경에서 나온 말투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이 미운게 아니다. 그저 내가 그 자리에 끼면 안될 부적응자라는 느낌이 들고, 스스로 열패감에 빠지는 것이다. 


내가 마음 먹은건 흉터는 부끄러운게 아니라는 마음이다. "어머 흉터 생겨서 어떡해!" 하는 사람이 많지만, 난 흉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걸로 인해 괴로워하고,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을 안다. 당신은 잘못한게 아니다. 그러니 부족함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키작고, 내가 가난하고, 내 얼굴이 뒤틀린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됐을 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절대 혼자서 성공한게 아니다. 나 역시 여기까지 오는데 혼자 노력으로 온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만큼밖에 못 온것도 내가 부족해서 그런것도 아니다. 내 환경에서 나는 노력했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음을 안다.


누군가는 거만하게 많은 것들을 받았음에도 "내 힘으로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배우는 뛰어난 얼굴만으로 자리를 꿰차곤 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지만 나는 못생긴 언더독이 좋다. 받은 것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낸 사람이 좋다. 고결한 천사 같은 사람이 아닌 사람냄새 나고, 사람다운 사람이 좋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다. 비록 못났고, 작고, 약하지만 여기까지 이겨낸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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