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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Nov 08. 2019

신경끄기의 기술

끝나지 않는 재방송에 지쳐 리모콘을 던지다

얼마전 한 행사에서 생수를 나눠주었다. 하루에 4000개 가량의 생수를 무료로 나눠주는 일이다. 무료로 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엄청나게 많진 않다. 4~5명이 동시에 주다보니 왠만한 줄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더운 날에 시원한 물을 공짜로 얻을 생각에 다들 줄을 서지만 몇몇 노인은 줄을 서지 않고 물을 요구한다.  '신경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선 줄을 안서고 물을 받으려는 이 노인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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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화가 나는 일도 있고, 자신의 통제 밖으로 넘어간 일도 있다. 일찍 출발을 했지만 지각을 한다. 맛있게 끓인 라면을 쏟는다. 일상 속에서도 원하는대로 이뤄지지 않는데 사람 사이의 일들에선 더 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때 '신경을 끄라'고 말한다. 5분간은 화가 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신경 쓰지 말고 '꺼져'라고 말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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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쓰는 상황은 언제나 생긴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신경거리가 있으면 작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모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 댓글로 싸웠던건 기억하기 힘들다. 새로 올린 프로필 사진에 '좋아요'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건 신경쓸 여력이 없다. 그러나 신경쓸게 하나 없다면, 1분도 안되는 줄을 서면 받는 생수에 사활을 건다. 그에겐 물을 받는게 가장 신경써야할 일이다. 새치기를 하고서라도 물을 받고, 받지 못하면 노인공경을 운운하며, 분노하며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노인을 비난받아야할 사람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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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수많은 사소한 일들에 신경을 쓰고 분노하며 살고 있다. 지금 있는 군대라는 환경은 더욱 독특하다.  사회였다면 절대 화내지 않을 상황에서 화를 낸다. 필요치 않은걸 후임들에게 강요한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성의없이 대답한 후임과 이상한 지시를 하는 선임을 욕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 속 TV채널에선 그 장면이 몇 시간째 재방송된다. 편성표는 바뀌지도 않는다. 시청자의 뜨거운 호응 속에서 또 다시 재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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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채널을 바꿔야 한다. 한 때는 재방송을 전혀 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조금은 잘나간다던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나를 발전시킬까하며 며칠 후 있을 멋진 장면을 수없이 반복한다. TV에선 경기장으로 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3점 슛과 크로스오버를 한다. 조금 후엔 전교 1등이 된 모습이 보인다. 졸업식 시상대에 오른다. 이 TV프로그램은 1년이 지나 현실에서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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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어느날 부턴가 재방송만 편성되었다. 나는 좀생이처럼 신경을 쓴다. 서운한 말 한마디와 서운한 태도와 내 실수들을 녹화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처음부터 돌려본다. 잊으려고 유튜브를 보거나 일기를 써봐도 하루의 감정은 텅 비었다. 그럴때 난 기억해야한다. '신경을 끄자. 사실 별거 아니다.' 사실 삶에서 생기는 갈등은 너무도 작아서 불과 2주만 지나도 잊혀지고, 1달이면 관계가 도리어 좋아지곤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스스로를 소비시키며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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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는 막장 드라마를 즐겨보신다. 이혼과 갈등이 끝이 없다. 누구의 애인지는 좀처럼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나 역시 막장 드라마의 팬이 되었다. 나는 괴롭히는 생각들을 보고, 그걸 반복한다. 스스로를 학대하는걸 원하는지도 모른다. 어리석게도 그게 남과 나를 미워하게 하고,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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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떤 채널을 보며 잠에 들까.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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