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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Nov 08. 2019

패배의 즐거움

오늘은 져도 내일은 지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재밌었던 일은 1:1 대결에서 지는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농구를 잠깐 배웠다. 딱 1달. 농구를 1달 배우면 보통 레이업 슛을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엄청난 특권이 된다. 대부분의 농알못 친구들은 드리블도 배워본 적이 없기에 레이업 슛은 '무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키가 작은 나는, 고1때 165cm쯤 되었다. 처음엔 나보다 못하는 친구들과 농구를 했다. 나는 레이업 슛을 하고, 다른 친구들은 공 튕기기도 어려워했으니 매번 이겼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렇게 양민학살을 하던 중에 고1중에서 가장 잘하는 친구와 1:1 대결을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180cm가 넘었고, 팔이 길어서 긴팔원숭이라고 불(놀)리기도 했다. 그는 1학년 중 최강이었다. 나도 반에선 잘하는 편이었기에 반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붙었다. 반 친구들의 내심 기대어린 눈빛을 보았고, 전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길 줄 알았는데, 처참했다. 1골도 넣지 못했고, 굴욕적인 블락을 맞으며, 7:0 패배. 그는 언스톱퍼블이었고, 나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안타까운 눈빛을 피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꾸준히 농구를 했다. 먹잇감을 발견한 그 녀석은 내가 친구들과 3:3을 하고 있으면 와서 1:1을 신청했고, 다시 붙었다. 결과는 7:0 패배.


그러나 두 번 지는건 한 번 지는 것보다 쉬웠다. 패배의 속쓰림은 적었고(편안함은 오래갈꺼야), 상대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상대의 페이크, 손동작, 발동작, 선호하는 돌파 방향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끝을 보기로 결심한 듯 매일 붙었다. 매일 점심 또는 청소시간이면 1:1을 했다. 물론 1:1이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웠다. 그의 입장에선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골밑 슛으로만 이겼고, 어떤 날은 투스탭(두 발자국 걸으면서 돌파하는 기술)만으로 이겼고, 어떤 날은 미들슛으로만 이겼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발리는 모습을 보고, 날 허접으로 보고 도전하는 친구이 있었다. 나는 이길 의도가 없었지만 대부분 나에게 박살났다. 제일 잘하는 상대랑 맨날 붙으니 당연히 2등이 된 것이다. 또 이상한 일은 7:0이던 스코어가 7:1, 7:2, 7:3으로 붙는 것이었다. 그리고 7:4까지 갔을 때부터 재미가 빠졌는지 그 친구는 축구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반면 난 계속해서 농구했다. 고교 농구에서 새로운 강자들을 만나고, 동아리 형님들과 붙으면서 꾸준히 농구했다. 항상 대회에 나가고 싶었는데 고3때 꿈을 이룰 수 있었다. 3:3대회에서 우승하게 되었는데, 모든 경기를 수 십 점씩 차이내며 압살한 것이다.


지금도 나는 농구를 좋아하고, 매주마다 2시간 이상 슛 연습을 한다. 비록 키가 아침엔 170, 저녁엔 169이고, 나보다 잘하는 스트리트 고수들, 무한 체력의 고등학생들도 많지만 상관 없다. 농구가 즐겁고, 져도 즐겁다. 강한 상대와 싸워서 지면 나도 강해진다. 강한 상대랑 또 싸워서 지면 더 강해진다. 그러다보니 코트에서 무서운 상대가 된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강력한 상대와 싸우고 있다. 그의 이름은 불확실한 미래이다. 대학원을 때려치고 나와서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날부터 그는 최강의 적이 되었다. 만만해보였는데, 수 개월 동안 노력했던 모든 게 실패로 끝나자 상대의 힘을 알게 되었다. 고분고분 공부나 했으면 평타는 쳤을텐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님께 너무도 죄송했다. 뭐하나 이루지 못하고 늦은 나이에 군대로 끌려가는 모습은 패배 그 자체였다.


군대에서도 적은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제약들은 그 어느때보다 강력했다. 책 한 줄 보지 못하던 훈련소 시간들과 왜이리 긴 교육기간들, 여유 없는 막내 생활을 견디면서 버티고 버틴다. 매일 밤까지 책을 보고, 인강을 보면서 날 지킬 무기를 만든다. 불확실한 미래를 잘라낼 무기를 만든다.


적은 얄밉게도 항상 나를 이기고, 항상 나를 바보로 만든다. 그러나 알고 있다. 나는 내일도 지겠지만 이제는 7:0으로는 안 진다.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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