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7월 30일

2023. 7. 30

by 한상훈

새벽을 지나며 미뤄둔 일을 처리했다. 언제나처럼 내 기대대로 집중하니 30분 정도만에 많은 부분이 해결됐다. 뉴에이지 피아노와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기분은 참 좋다. 세상이 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공간에서 완벽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같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삶은 행복하다. 당장 내 등 뒤엔 언제든 가지고 놀 수 있는 플레이스테이션과 몇 가지 게임이 있고, 원하는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어떤 영화도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쿠팡 플레이 등이 있고, 무엇이든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배달 음식이 가능하다. 이전에는 왕도 누리지 못하던 호사를 누리고 살게 됐으니 어찌 보면 만족하고, 사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마주하며 그것을 즐겁게 마주하며 해결하고 있다.


오늘은 디자인 작업과 남은 몇 개의 코드 작업을 마치고, 글을 쓸 생각이다. 지난 몇 달째 써온 알고리즘 책이다. 알고리즘 책을 처음에 쓸 때는 금방 쓸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을 쓰고 나니 너무 무겁고, 전혀 재밌지 않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그래서 모든 글을 지우고, 서문부터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난달이 돼서야 책의 1/5 정도를 작성할 수 있었다. 큰 골격을 잡은 이후로는 쓰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것보다 빠르게 처리할 일들이 언제나 많다 보니 미루고 미루는 일이 많았다.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루고 살았다.


꿈속에서는 잊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편이다. 평행 우주에 갇힌 사람처럼 같은 꿈을 반복하며 조금씩 다른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아주 오랫동안 반복해서 꿨던 꿈은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4학년, 5학년이 되는 것이다. 이 지독한 꿈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고 나서야 사라졌다.


군대 생각을 할 때면 평범했던 나날들 보다는 특별한 몇 가지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훈련소에 입소할 때 본 부모님의 모습과 응원해 주러 온 한 친구의 모습. 군 병원에서 몰래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던 날. 매일 듣던 목소리를 몇 주 만에 들었을 때 기분. 자대를 배치받고, 내가 근무할 곳을 갈 때 트럭 뒷자리에 타고 선임들과 이야기하던 순간. 탐측병 추가 교육을 받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몇 주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교육을 듣던 시간들. 군대 안에서 프리웨어였던 ‘오로라 플래너’를 ‘에어데스크’로 바꾸면서 같이 일했던 친구와 많은 갈등을 겪었던 일들. 모든 기간을 마치고, 마지막 동기와 성남 터미널 앞에서 모두 끝났다며 환하게 인사했던 날. 지금 생각해 보면 꿈처럼 흔적뿐인 기억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잔상을 쫓으며 살지 않는다. 도달하고 싶은 곳이 있기에 그곳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고 있다. 도달하고 싶은 삶의 모습이 대단한 건 아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을 삶에 더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삼청동 덕상여고 앞 돌길을 산책하는 것이다. 그곳은 봄에 가도, 여름에 가도, 가을에 가도, 겨울에 가도 아름다운 길이다. 날이 좋은 봄날에 그곳을 가면 산책을 나온 가족들, 여행을 온 외국인,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이 한가로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불면 돌길 옆으로 선 나무가 선선히 흔들린다.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만들어내는 소리와 사람들의 조용한 목소리가 그 어느 곳보다 평화롭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홀로 그곳을 찾아간다. 목적지도 없이 그렇게 걷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정독 도서관의 벤치에 앉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을 보곤 한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천천히 걸어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 부모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 그 모든 장면들이 마치 세상이 아닌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다.


무더운 햇빛에 땀이 조금 흐를 때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삼청동과 북촌, 안국과 아래의 인사동에는 쉬어갈 수 있는 찻집이 많다. 찻집에 가서 평상시에 먹지 않던 따뜻한 한국 차를 마시며 감사함을 느낀다. 왜냐면 이곳은 나에게 아주 오랫동안 동경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를 다닐 때도 공부가 하기 싫을 때면 지하철을 타고 와서 한참을 이렇게 걷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여유가 없어 배가 고파도 편의점에서 파는 레스비 한 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나도 이곳을 평화롭게 거닐 수 있고, 주말이면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러 올 수 있기를 꿈꿨다.


“꿈꿨다.”


참 아름다운 단어다.


오랫동안 꿈꿔온 일들이 하나 둘 현실에서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 길에 확신을 얻곤 한다. 그리고 수년간의 내 모습들을 잔상처럼 마주한다. 20살, 21살, … 29살이 될 때까지 간절하게 꿈꿨던 소박한 것들이 하나 둘 이뤄져 갈 때. 나는 과거의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포기하지 않고 살아주어서 고맙다. 꿈을 놓치지 않고 살아주어서 고맙다.


고맙다.



일기를 쓰며 나는 화해하고 있다. 수많은 과거와 화해하고 있다. 나를 괴롭게 한 모든 이들을 향한 용서, 나를 응원해 준 이들에게는 감사, 살아온 나에 대한 응원. 그리고 이것이 삶이라 생각한다.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삶이 아니다. 모든 순간들이 삶이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장례를 준비하는 것 같다. 언제든 영원한 이별을 떠날 수 있는 이들이 내 주변엔 많이 있다. 이들과 오늘을 마지막으로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 역시 많은 이야기를 겪으며 살아왔지만, 어느 날 떠난다면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기억해두고 싶은 것 같다. 삶을 놓치고 싶지 않기에 말이다. 언제든 세상을 떠날 것을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나 보다. 나도 한 명의 사람으로 이 사회에서 햇빛을 보고,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많기를 바라며 아등바등 살고 있었나 보다.


내 인생은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 가진 것은 무거운 빚과 해결해야 할 수많은 책임들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다. 살아서 내 주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함께 즐거운 순간들을 많이 많이 만들고 싶다. 힘든 세월을 보내느라 부모님은 우리와 함께 해외여행 한 번을 못 가보셨다. 나와 함께 고생했던 형제 같은 친구, 동료와 견디기만 할 뿐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 못했다. 축배를 들고, “모든 걸 해냈다.” 하며 만화에서 열리는 연회 같은 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날을 향해서 나는 나아가고 있다. 그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즐겁게 삶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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