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훈 Jan 13. 2024

만약 가능했다면

2024. 1. 13.

나는 내 삶을 해결할 충분한 힘과 에너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내 문제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내가 1.5배, 2배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쉽게 해결될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지난 2년을 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지 않고 견뎌냈다면 쉽게 해결될 일들을 나는 쉽게 해결하기보다는 남들에게 의존하며 게으름을 부린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내가 게으름을 부린 거라 말하긴 쉽지 않다. 아무리 적게 일해도 일반적인 직장인들의 하루만큼은 일하며 살았고, 더 일해야 한다면 70~80시간 정도는 한 달에 2주 정도씩 해왔고, 그보다 더 해야 한다면 하루에 12시간씩 몇 달이고 하기도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믿는다. 왜냐면 결정적 순간에 강인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삶의 많은 순간들은 꾸준한 훈련도 중요하지만 결정적 순간이 존재한다. 운동선수에게는 중요한 경기, 사업가에게는 계약서를 확정하는 순간, 파트너십이 생기느냐 아니면 빈 손으로 돌아가느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그뿐인가. 많은 기회가 존재하는 사업가의 삶에선 기회를 버려야 할 지혜도 필요하다. 좋은 공에 스윙을 하지 않고, 적당히 좋은 공에 스윙하면서 안타를 만들어 뛰어다니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 되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지혜롭지 못한 순간이 온다. 체스에서 킹은 1칸만 이동하지만 가장 무거운 걸음을 하는 것과 같다.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지혜로웠다. 지혜롭지 못했다.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반추할 기록들은 끝없이 쌓여가지만 여전히 나는 나라는 인간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더 해낼 수 있다. 나는 더 발전할 수 있다. 나는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을 결코 놓을 수 없다.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의 잔이 기쁨으로 차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우리가 한 편으로 동경하는 세계 최고의 부를 가진 사람들, 세상의 정상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이들은 고통의 잔을 기꺼이 들이마시고, 그것이 자신의 업이라 여긴 이들이 태반이다.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트 그룹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소수다. 그곳에서도 경쟁에서 떨어져 나가 최정상 그룹이 되지 못한 이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남들이 보기엔 2등으로 멋져 보이지만 그들 자신의 눈엔 1등이 되지 못한 패배자로 스스로를 여기는 이들이 태반이다. 마치 왕의 서자처럼 그들은 거대한 권력에 언더독의 자리에서 대권에 도전하고, 장자를 밀어낼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기회를 감당할 자격을 스스로 만들지 못했다고 지난 몇 년을 평가하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거대한 기회를 감당할 능력이 과연 나에게 있었는가. 이제야 깨닫게 된 사실은 어떤 분야에서 깊은 이해가 있다는 것은 해당 분야를 부처님 손바닥 보듯 훤히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부처님이었지만 부처의 그림자조차 쫓아가지 못한 어수룩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부족했다는 진실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정명한 지식들을 마주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몰곤 한다. 나보다 더 지혜로운 이들을 찾아가 지혜를 구하고, 그들에게 내 부족한 의견을 담대히 전한다. 그들의 말이 칼이던 꿀이던 받아들일 각오로. 내 부족함을 깨닫기 위해 더 뛰어난 이들의 지식을 찾아다닐수록 부족함을 처참히 느끼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눈이 열려 간다. 더 많은 빛이 들어와 눈이 부셔 눈을 감고 싶은 느낌과 같다. 더 크게 밝은 빛을 보니 어둠 속에 지내던 눈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더 거대한 지식의 광장에 들어서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태양 아래에 선명하게 보이고, 그전에는 깨끗하게 보이던 아름다운 물체들에 묻은 티끌과 먼지, 얼룩이 보이며, 어두움 속에서 흔적을 숨기고 바삐 돌아다니는 이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인다. 


광명한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리고 감당할 힘이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큰 빛을 쫓아 한 걸음씩 내달리고 있다. 과거의 내 모습을 후회하며 말이다. 조금 더 해내지 못했던, 결정적 순간을 놓쳤던 수많은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려 보며 말이다.


사람들의 군집은 선명한 패턴을 보이곤 한다. 엘리트들은 엘리트들의 생리를 따라 살고, 서자는 서자들의 룰을 따라, 그리고 그런 것도 모르고 이 판에 뛰어든 나 같은 길거리 부랑자 같은 사람들은 거리의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타인에게 보이는 뻔한 패턴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고, 나 역시 하나의 군집처럼 일관된 행동과 일관된 패배를 경험하며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제대로 바꾸기 위해선 극단적인 결단이 필요할 수 있다. 나는 지독한 불균형과 이로 인해 얻은 괴로움들에서 자유롭기 위해 서른이 다 되어서 뼈를 깎는 수술을 결심했다. 다른 선택지로는 미봉책일 뿐이었기 때문에. 미봉책은 미봉책일 뿐 뼈를 깎아야 한다면 뼈는 깎여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없고, 분명 가능한 미래는 존재했다. 가능한 미래가 존재했기에 나는 더욱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가능한 미래를 불가능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선택을 그만두고 싶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유일한 길이 있다면 현재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 지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이 순간 내가 경험한 모든 지식과 축적한 노하우와 지혜를 사용해 현명한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정답이 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용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