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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Jan 14. 2024

희망과 거래

2024. 1 .14.

판도라의 상자에는 온갖 괴로움이 들어있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나니 세상엔 슬픔과 괴로움, 고통, 절망, 시기, 분노, 혐오와 같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감정이 퍼져나갔다. 온갖 괴로움이 가득한 그 상자 안에는 최후에 한 가지가 남아있었는데, 바로 희망이었다.


어린 시절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 희망은 좋게 묘사되곤 한다. 온갖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으로, 희망을 절망에 대항할 무기처럼, 한 편으로는 희망은 미덕인 것 같이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희망은 거래다. 현재를 이겨내면, 현재에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면, 미래에 좋은 일이 펼쳐지리라는 불확실한 계약이다.


희망은 스스로를 향한 거래이다. 내가 지금 공부를 하면 나는 좋은 대학에 갈 거야 하며 거래를 한다. 여러 하고 싶은 것들을 내려놓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한계까지 내몰며 착취한다. 희망을 주입하는 이들도 있다. 더 열심히 한다면 더 좋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 비단 학교뿐만 아닌 모든 곳에서 희망이 주입되고 희망으로 인해서 때로는 불합리한 일들도 견디며 우리는 미래를 기다린다. 희망에 보상이 오는 그날을 기대하며.


희망은 학습될 수 있다. 좋은 부모님은 어린아이들에게 희망과 보상의 구조를 어린 시절부터 학습시킨다. 이를 바탕으로 예의를 가르치고, 자신의 욕망과 쾌락만을 쫓아 행동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도 가르친다. 성실히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고,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걸 깨닫게 한다.


희망이 성취되고 그것이 진정 바라는 것일 때 사람은 더 큰 희망을 품고 담대하게 헌신할 수 있게 된다. 노력의 성과가 보였고, 그 성과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니 더 큰 희망을 품는다. 학창 시절 하버드를 노리던 친구들은 하버드에 가서는 더 지독하게 공부를 하고, 로펌과 월 스트리트, 세계적인 기업에 들어가서 살인적인 업무량을 견디며 승승장구한다. 희망은 그들에게 연료이고, 동시에 그들을 끝없는 성공의 굴레로 이끌게 하는 계약이다.


반면 작은 희망도 꺾인 이들은 희망과의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은 희망은 이미 수차례 무너져왔다. 시험 성적을 올리면 맛있는 걸 사주겠다던 부모님의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서 여자친구가 생긴다던 희망도 이뤄지지 않았다. 좋은 기업에 가면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길을 걷는다. 희망은 누군가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지만, 누군가를 영혼부터 쥐어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한 톨의 빈 틈 없이 사람을 무너뜨리게 한다.


희망이 거래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진실이다. 노력을 하면 삶이 바뀔 것이란 말은 인생을 살면서 겪는 수십, 수백 번의 실패를 통해 이뤄지지 않는 거래라는 것을 배우곤 한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노력했으나 변화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작은 거래를 성공해야 했지만 그 작은 거래를 성공할 영혼의 연료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불타버린 영혼의 연료는 희망과의 거래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든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과 더 이상 거래하지 않으면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희망이 없는 곳에는 더 나은 미래가 없다. 그래서 꺼저버린 희망을 가진 이들은 타인의 희망에 기대곤 한다. 내가 아닌 나를 동일시한 누군가가 성공하기를 바라며, 나도 그 희망이 이뤄지기를 먼발치에서 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드라마에서, 누군가는 애니메이션에서, 누군가는 정치를 통해, 종교를 통해, 아니면 모든 희망이 꺼져버렸다면 이 삶이 아닌 그다음 삶을 기약하며 우리는 미련하게도 희망을 끝까지 잡고 있다. 희망과의 거래를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있던 온갖 감정과 고통들은 인간으로 살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적인 것들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화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때로는 체념하지 않고 살 수 없다. 아무리 승승장구하며 언제나 이기며 사는 것 같은 이들도 수많은 좌절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희망과의 거래에 응한다. 그 거래 중 어떤 것들은 필연적으로 내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선물을 가져다줄 것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희망을 품는 것은 아픈 일이다. 특히 희망을 품을수록 더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면 희망을 품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이 희망을 품는다. 가슴에 피가 나는 고통이 느껴져도 희망을 품는다. 내 희망을 타인을 향해서, 드라마 속 주인공을 향해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향해서 전달하지 않는다. 나의 희망은 오롯이 내가 품는다.


희망과의 거래가 무너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친구로 대하고 싶다. 고통도 절망도 내 친구인 것처럼. 여전히 희망을 품는다. 그 희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가슴속 깊이 끌어안아본다. 아픔이 사라지고 힘을 얻는다. 힘든 세상을 이겨낼 한 줄기 희망.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게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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