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3.
성경에는 숨겨진 진실이 많다. 그중 수많은 논제들은 지금까지도 역사학자, 변증론자, 신학자, 성경학자, 과학자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검증되고 반박된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소개할 것은 바로 예수가 동정녀를 통해 나타났다는 점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사실은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하여 아기 예수를 낳았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예수의 제자들이 쓴 복음서 중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예수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적혀있을까?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됐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사실이 마태복음에서 기록됐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에서는 기록할 이유가 없어서 빼둔 것일까?
흔히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순서로 신약성서가 배치되어 있으니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집필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작성된 것은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가 기원 후 50년 경에 작성됐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기원 후 70년 경 마가복음이다. 마태복음은 그보다 늦은 80~85년 경에 작성됐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첫 번째 신약 성경이라 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인 데살로니가 전서보다는 30년 이상 늦었으며, 동시에 마가복음서가 작성되고 10~15년 후에야 마태복음이 작성된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을 작성한 마가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알고서도 작성하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예수가 죽고 수십 년 동안이나 이와 같은 사실을 기록한 이는 없을까?
예수의 출생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증거도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다.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바로 사탄, 악마와 같은 말로 저주를 퍼붓는 기독교인들도 많아 참으로 조심스러운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수많은 논쟁은 단순히 신앙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검증함에 있어 사건이 발생했다면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됐고, 얼마나 많은 기록들이 이를 증명하냐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현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넘어가곤 한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사건, 노아의 방주, 피처럼 내리는 비, 물고기와 빵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인 이야기 등. 그중에서도 부활은 그 무엇보다 큰 사건이기 때문에 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큰 증거가 따라와야 한다.
당연하게도 예수가 부활했다면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많아야 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예수가 부활한 당시(서기 33년 경)에는 부활에 대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해당 내용이 기록된 흔적도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기록이 됐을까?
먼저 알아볼 성경은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마지막장인 16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재밌게도 부활의 내용이 담긴 16장 9절에서 20절의 부분이 진본 마가복음에서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의 마가복음은 16장 20절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9절부터 20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추가된 것인가? 그리고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부활이 진본 마가복음에는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고, 향후 추가된 내용에서나 담겨있을까?
이에 대해 현재까지도 9절부터 20절에 대한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만약 해당 내용이 후대에 추가된 내용에 불과하다면 성경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가장 믿을만한 사본들, 오래되고 신뢰할 수 있는 마가복음의 사본(성경 중 원본은 찾을 수 없기에 모든 성경은 사본들을 비교 검토하여 검증한다)에는 없는 내용이 다름 아닌 부활이라는 점이다.
9절에서 20절이 향후 추가됐고, 또한 이 내용을 신뢰하기 힘든 여러 이유는 많다. 앞선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과 비교했을 때 문체와 단어의 차이가 나타나고, 고대 사본(시나이, 바티칸)에도 없을뿐더러, 내용이 중첩되고, 또한 9절에서 20절까지 추가된 버전이 4개의 또 다른 버전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정작 9절에서 20절에 대한 내용은 옮긴 사람들끼리도 무엇이 성경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라 주장한다.
물론 그들 역시 부활을 옹호하기 위해서만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8절에서 끝난 내용이 다른 장과 복음서에 비해 짧게 마무리되는 것. 또한 사본이 많다는 것(그러나 후대에 추가된 사본이 많은 것이지 고대의 사본은 없다) 등이다.
이처럼 당장 마가복음서만 해도 숨겨진 논쟁이 있는데 문제의 9절에서 20절은 어떠할까? 9절부터 20절의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못해 거친 수준으로 부활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믿음 없는 것을 비판한다.(14절) 또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고,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 죄인으로 단정 된다 말한다.(16절) 이후에 믿는 자들은 뱀을 만지거나 어떠한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18절)라고 한다. 이것이 비유건 직접적인 표현이건 이러한 믿음으로 뱀을 만지거나 독을 마셔 죽은 기독교인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럼 다른 복음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복음서 중 가장 먼저 부활을 다룬 마태복음서는 28장 부활을 서술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기원 후 80~85년도에 작성된 기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된 마가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부활의 내용을 마가복음서 10~15년 후에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한 술 더 떠 애초에 예수가 사망한 것은 서기 33년인데, 이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부활에 대해 서술한 것은 예수의 제자 마태가 확실할까?
안타깝게도 마태복음은 우리가 "마태"의 복음으로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지도 않다. 정확히는 복음서 4개 모두 정확히 누가 작성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에 대해서도 역사로 들어가 보면 마태복음의 경우 저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추정을 해야 하는데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인 마태(직업은 세리)가 작성했다고 초대교회에서 이를 인정했다고 한다. 재밌게도 이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초대교회에서 익명의 복음서를 어떠한 기준과 근거로 마태가 작성했다고 확신했을까?
이처럼 복음서는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한 절차와 근거를 바탕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에 있고, 애초에 어떤 근거로 그렇게 정해졌는지도 모르는 문서들이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점이다. 성경을 모독하는 것 같겠지만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그 시대의 사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삶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당시 사람들의 선택을 받은 성경들이 초대교회에 뽑히게 됐고, 더 많은 사본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교리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내용이 다른 기준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사라진 사본들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신이 남긴 사본이며 성경이라고 확실할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보는 독자라면 가능한가? 어떤 이들은 담대하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정작 이 문제를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기에 성경의 기준은 출발점이 같은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 다르게 됐다. 즉 성경을 정한다는 것은 이 모든 종교의 기준을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뛰어넘을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저 믿음이라는 이유로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는 사람들만 있다.
성경의 역사적 시점에 대한 논쟁과 내용에 대한 논쟁. 동일한 내용을 교차해서 다루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기에 성경은 천년이 넘는 세월 간 가장 많은 사람들을 분열하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출발한 각 종교는 모두 성경에 대해서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편집하고, "이걸 믿자"라고 정한 내용을 교인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교리라 칭한다.
논쟁인 부분에 대해 확언하는 것은 진리를 편집하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음에도 주저함 없이 그들은 편집된 사실들 중 취사선택을 하여 진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설교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사탄, 죄인, 신성모독자 등으로 비난하며 광신을 요구하기도 했다.
역사적 질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또한 가르침을 전하는 성직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모든 진실을 알진 못하겠지만, 무엇이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할 부분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인류는 뇌에 대해 정복하지 못했음에도 뇌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수술하는 의사가 있다면 의사는 윤리를 저버린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논쟁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또는 알지 못하고 그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기독교에서 애지중지하는 마태복음 5장 19절에는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분명 우리는 어느 날엔가 세상을 떠나 무엇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구약에서 이야기한 스올이 우리가 향할 곳인지, 아니면 무의 세계로 돌아갈지. 또는 천당과 지옥. 도교에서 말하는 저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들에게도 편집된 진실이 전달되고, 편집된 진리와 어긋난 역사적 질문들에 대해 감추려는 이들은 존재한다.
성경은 온전한 것이라며 그 어떤 역사적 반증이나 물음도 허용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편집됐고, 단어가 변경됐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해석의 차이, 표현에 차이에 따라 다른 성경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 뿐인가? 성경의 인물을 그린 성화에서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악인과 선인을 표현하기도 하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창작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떤 것이 진리의 말씀이며, 어떤 것은 사탄의 메시지라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이 글을 적는 2024년에는 기독교만 해도 전세계적으로 2만개 이상, 한국에만 300개 이상이 존재한다고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만으로도 교단이 280개가 넘는다)
신념과 광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역사와 의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선이라고 부르는 교리 뒤편의 진실은 참으로 많다. 너무도 많고,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숨기기 급급하다.
이 모든 거짓들 뒤에는 신이 숨어 있을까.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허상의 기록들만이 남아있을까. 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온전히 성경을 믿을 수 없는 딜레마가 성경을 아는 자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