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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May 01. 2024

바람이 부는 길

2024. 5. 1.

Paranoid Android II - BRAD MEHLDAU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시골 사람답게 오래도 걸었다.


20대 초반 시절 검게 탄 모습


땡볕에 하루에 적어도 2시간 가까이 걷다 보면 얼굴과 팔다리. 햇빛이 닿는 모든 곳이 검게 탔다.


15살의 나는 세상도 모르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도 모르고, 그저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는 것을 그리며 2시간씩 걸었다. 여러 꿈들을 꾸며. 여러 버전의 나를 생각해 보며 말이다.


당시 가지고 다닌 MP3에는 기타 연주곡이 많았다. 그때 유행했던 캐논 락버전 같은 곡들이었다. 기타리스트가 된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도 그려보면서 중학교 3학년 때는 한참 동안 기타에 빠져있기도 했었다. 여러 버전 중 하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버전의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온갖 갈래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기타를 치고 싶던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 졌고. 농구를 잘하고 싶어 졌고.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주커버그 같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간절하게 성공하고 싶었고. 내가 살아온 모든 길이 하염없이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의 무가치함과 멍청함에 좌절하며 방 안에 앉아 슬퍼하던 날도 있었다. 15살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여러 갈피로 뻗어나간 인생에는 수없는 고통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단 것을.


여전히 나는 15살의 소년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인생의 선택지를 보며 고민해보곤 한다.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경험하게 된 말도 안 되게 많은 제안들은 내 미래의 행방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한 달이 지나갈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하는 인생의 이야기는 값지다. 기업의 회장들부터 정치계 인물들. 퇴역 장군. 로비스트. 사회성이 결여된 개발자. 범죄자. 사기꾼. 유흥업계 종사자. 그뿐인가 큰돈을 굴리는 개인 고래들과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인물들까지.


수만 가지 갈래로 펼쳐나간 인생들의 단면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의 인생만큼이나 그들의 인생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적혀있겠구나 싶다. 그들의 15살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때 우리가 같은 나이로 같은 반에 있었다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만약 다시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살아보겠냐는 질문을 해보고 싶다. 당신이라면 다시 처음부터 인생을 살아보겠는가.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 다시 인생을 다르게 펼쳐보겠는가.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삶도 수많은 후회와 반성. 아픔 속에서 성장해 왔기에 올라왔던 것이기에, 과거로 돌아간들 후회와 반성, 성장이 없이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성공은 없다고 믿는다.

세상은 모두에게 같은 무게의 가방을 쥐어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천 근 보다 무거운 돌들을 메도록 하고, 누군가에게는 깃털 하나 담겨있지 않은 가방을 내어주기도 한다. 누가 삶을 바꿀 수 있겠는가. 지금 돌을 조금 덜어낼 일을 한다고 한들 미래가 온전히 밝아질 것이라 확신할 수 있겠는가.


처음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처음이 되는 것이 세상이라. 나는 설령 내가 밑바닥에 머물러 있더라도 위를 꿈꾸며, 위에 있더라도 주의하며 걷기에 신경 쓴다. 그 누구도 영원히 꼭대기에서 고고하게 머물 수 없다. 연속된 성공은 오만함을 낳아 실패를 야기한다. 가슴 아픈 패배는 세상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오만한 이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실패가 가까이 온다는 것. 그들이 지혜롭게 도망쳐갈 수는 있을지언정 죽을 때까지 지혜로워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나에겐 실패가 값지다는 말이 얼마나 아픈 말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을 먹고, TV와 컴퓨터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한 편으로는 막연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선명해진 세상에서 선명하게 세상을 보고 있으나, 이것이 어쩌면 가장 선명한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란 생각도 든다.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것처럼 내 기억력과 학습력, 습득한 모든 기술과 전문성 역시 녹을 닦아내야만 빛을 발할 수 있다. 어느 날 엔간 이 모든 것이 지워지지 않을 녹이 스며들어 쓸 수 없는 날도 오겠지.


작은 스타트업 CTO 시절

인생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모두에게 무심하기에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스친 바람은 나를 스치며 경로가 바뀌게 된 것처럼, 수 백번의 과거로 돌아간들 내가 마주할 미래는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쩌면 그 거대한 소용돌이를 마주한 겁먹은 영혼이 아니었을까. 그전까지는 볼 수 없던 소용돌이를 이제 막 보기 시작한 건 아니었을까.


바람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딫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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