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죽음을 당한 영혼을 위한 공정한 재판은 있는가
나는 신파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다 짜고 하는 영화이고, 각본이고, 소설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슬픈 영화를 보기 힘들다. 영화 '신과 함께'가 그랬다. 무고한 병사가 죽고, 병사는 저승을 거닐며 재판을 받는다. 아이러니하다.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무고한 병사가 재판을 받으러 다녀야 한다니.
한국 사회는 병들어있다. 국방부를 떠올려 보면 모든 한국 남성들은 똑같이 말할 것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이 아니라고. 그저 진급에 눈이 멀어 사고를 감추기 급급한 장성들과 장교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기 위해 하지도 않은 야간 근무를 찍고, 심지어는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범죄에 가담하도록 명령하기도 한다. 썩어빠진 인간들의 군상을 대한민국 남성들은 군대라는 곳에서 학습했다. 국방부와 이 병든 조직에 대해서 어쩌면 포기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이들은 개선 불가능한 조직이라는 마음으로.
12사단 훈련병 사건도 오늘로 약 2주째 흘러간다.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져 간다.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휴가를 받은 중대장은 어떤 심정으로 휴가를 보냈을까. 무고한 병사를 죽인 참담한 마음으로 휴가를 보냈을까? 아니면 조금의 죄라도 감형받기 위해 온갖 변호사 꽁무니를 쫓아다녔을까. 나는 묻고 싶다. 지금쯤 구천 어딘가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병사의 영혼이 있다면, 그리고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안위가 우선인지를.
나는 신파 영화를 싫어한다. 영화를 볼 때만 울고 불고 하면서, 가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슬퍼하지만 정작 우리 주변의 실제 인물들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비극과 신파는 콘텐츠이고, 정작 현실에서 신파를 마주하면 분노하지 않는다. 편 가르기를 하고, 나와 상관없으니 잊어버린다. 어차피 1주 뒤면 새로운 범인이 나타나 새로운 이슈로 세상을 뒤덮을 테니. 신파도 콘텐츠. 누군가의 슬픈 사건도 콘텐츠. 혐오스러운 인간상 그 자체를 보면 나는 메스꺼움을 참을 수 없다.
멀리 있는 죽음이라 생각하니 나에게 와닿지 않기에 침묵한다. 나와는 무관한 죽음이라 생각하기에 침묵한다. 개미 목숨보다도 못한 젊은 청년들의 목숨에 대해서 왜 분노해주지 않을까. 나의 형제가 나의 아들이 그렇게 떠나갔다면 여전히 침묵할 수 있을까.
썩어버린 사회와 군대 조직에서 나는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슬픔마저도 콘텐츠로 삼으며 한 번 울어버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영화 '신과 함께'는 천만명이 넘게 보고 울어주었으면서 무고한 한 용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명이나 눈물을 흘려주었을까.
가해자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한 이 사회에서 남은 신뢰가 무엇이 있을까. 어떤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대한민국의 군대로 보내고, 군인이 자랑스럽다 말할 수 있겠는가. 최후의 한 명까지 끌고 가는 대한민국의 무능력한 국방부와 군에서 정한 훈련 강도도 지키지 않고 가혹행위로 사망에 이르게 한 중대장까지. 이들은 심각한 병에 들어있다. 그들은 그들의 조직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능하고, 무책임한 조직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신과 함께'를 보며 울었던 이들은 며칠 전까지 사회에서 지내던 젊은 청년의 삶에 대해서도 울어주었으면 좋겠다. 영화보다 비참한 한국 사회를 보며 울어주었으면 한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난 훈련병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