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
2023년 봄, 나는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한 병원에서 잘 타고 다니던 포르쉐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쯤 나는 많은 분노 속에 살고 있었다. 그전까지 마주한 수많은 범죄자, 인간 말종, 쓰레기들을 보면서도 사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왔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내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편안 길을 걷고 싶었다. 수중에 돈은 없었지만 들어올 돈은 차고 넘쳤다. 이래저래 20억 남짓. 하지만 자유를 향해서 범죄자들의 삶들에 침묵하고 살아보려 했지만 그들은 끝없이 넘쳐났다. 베트맨이 본 고담시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한 번은 내가 사는 곳 인근에서 자살한 여자에 대한 수사 문의도 있었다. 내가 이 분야에 비하인드를 알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연하게도 자살한 여자는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고, 그 배후에는 깡패들과 코인 범죄자들이 있었다. 내가 수년간 비전을 가지고 만들고자 했던 사업은 어찌 보면 평범했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좋은 기업 문화를 가진 회사를 가꾸고 싶었다. 내가 모든 이야기를 직원들에게 하지 못했지만 사업을 하면서, 특히 IT 분야에서 지난 몇 년간 블록체인 세계와 범죄, 마약, 그리고 검은돈과 온갖 금융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비리들을 기술의 이름으로 덮기 위한 요청은 수 없이 받아왔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모든 IT 분야의 사람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를 기다리던 주차장에서 나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내가 아는 모든 강력한 힘을 가진 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참에 이 쓰레기 새끼들 모두 잡아 처넣고 싶은데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당황해했지만 대부분은 내 요청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그리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일을 추진하지 말라고 했다. 내 전략은 사실 간단했다. 이들이 하는 뻔한 범죄 패턴은 익히 알고 있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툴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패턴을 알기 때문에 역으로 이들을 조사하고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한 방에 싹 쓸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하는 일이 범죄자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이어서 문제였다. 강력한 힘이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 내가 혐오하던 범죄자들의 구매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놈들을 잡으라고 만든 도구를 경찰에게 가져다주었더니 사실 그 경찰이 악당인 상황이었다. 이런 씨발.
흔히들 범죄를 수사하는 쪽을 선한 쪽, 범죄를 저지른 쪽이 나쁜 쪽으로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곤 한다. 그러나 사실 둘 다 한 편이었다면 어떻겠는가. 누구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 시절쯤 나는 이런 조언을 많이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사법 기관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법 기관이 잘 작동했다면 피해자가 수만 명에 달하는 사기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상황은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법 기관의 꼭대기 또는 곳곳에 반대 측과 야합하는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면 사법 시스템이 어떻게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까.
나는 근본적인 고민을 했었고, 한 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들은 인생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어르신, 저는 돈만 보기엔 너무 대가리가 커버린 모지리인가 봅니다. 돈만 보며 사는 인생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존경스럽지도 않습니다 어르신. 내가 그들을 일말의 존경심도 없이 본다는 것을 그들은 좋게 생각해 줬지만, 나는 한 편으로 외로웠다. 모두가 알면서도 방관하고 쉬쉬하며 넘어가기 급급하다면, 그 강해보이던 인물들도 결국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뜻했다. 남자로 태어나, 인간으로 태어나 뜻을 정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이 없이 그때그때 시류에 따라 야합하는 삶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한 편으로는 가장 영악해질 생각도 하곤 했다.
영악해진다는 것은 한 끗 차이다. 시스템의 모든 취약점을 알고 있는 보안 전문가는 그 모든 취약점을 방어해 두면서 동시에 새로운 취약점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든 반대쪽의 마음을 먹게 된다면 강력한 방패를 날카로운 검으로 바꿔어 주인도 찌를 수 있는 법이다. 신념의 문제였다. 누구를 향해 칼을 겨두고, 누구를 지킬지 정해야 했다.
그러나 방패로 지킬 대상도 악인, 칼로 겨둘 대상 속에서 선인이 껴있다면 누구 편에 서야 하는가. 나는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답을 모를 때는 만들고 싶었던 것들을 만들며, 사람들이 같이 하자고 하는 이런저런 작은 사업들이나 비즈니스 기회들을 도와주었다.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가끔 이 모든 것을 떠나 처음의 마음 중 하나였던 좋은 기업을 만들고 싶은 뜻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희생한 만큼 사람들을 향한 내 기대와 희망도 많이 소진되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보이라 말하면 나는 그 증거로 희생이 담긴다고 믿는 사람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 더 사랑하는 쪽이 더 희생하는 법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따라 살아왔으나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이용했다 말하기도 했고, 거짓말을 하고, 착취한다 하고, 허황된 소리도 하며 희생을 이용했다. 누가 더 희생했는가.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즐겁고 웃고 떠들며,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비전은 사그라져갔다. 그것은 달성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큰 기업도 그런 기업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칼과 방패의 방향. 그 두 진영 모두에게 적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새로운 비전을 열어주었다. 세상 모든 것이 음과 양의 조화처럼 분별될 수 없는 선과 악이 존재한다면 내가 갈 길 역시도 누군가에겐 악으로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선으로 보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강한 신념은 때로는 또 다른 희생을 만들게 되고, 그 희생을 누군가는 헌신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착취라 말할 것이다.
방황의 시기를 겪으며 세상의 실체를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나는 기대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전과가 수십 개가 넘는 베테랑 범죄자부터 밀수꾼, 마약상, 잡범들과 사람들을 이용해 등쳐먹고, 정부의 이름에 기생하는 이들까지. 집구석도 제대로 청소하지 못하며 중국 거래를 한다는 자칭 큰 손 바이어들. 그뿐인가. 정치와 젊은 시절 이념 운동을 하며 지금은 모순된 삶을 사는 중년의 거물들. 그들이 이용하는 깡패들. 그들의 고객인 더 강한 힘을 가진 이들.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든 온갖 군상의 범죄인들을 보면서 오랫동안 이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범죄를 처단한다고 하면 범죄가 줄어드는가. 범죄자를 모조리 사형시키면 세상은 이제 선한 사람들만 남은 유토피아가 되는가.
그렇게 나는 범죄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와 삶을 들어보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살게 됐는지, 어떤 가치관이 있는지,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쉽지 않았다. 납득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고, 납득할 수 없이 오롯이 인간다운 욕망인 경우도 있었다. 인간이라면 자랑하고 싶고, 남자라면 매력적인 이성을 안고 싶은 마음이 당연한 것처럼, 욕망을 거세하는 게 아니라면 그들은 욕망의 답을 찾아 수단으로 잘못된 선택도 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어려운 고민을 마치고 여전히 나는 무엇이 정답인지 어느 편에서 방패를 세워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내가 아는 것보다도 더 많은 정보가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어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참으로 우스울 정도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 같았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누군가가 의심되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행동을 어떤 검색을 했고, 뭘 지금 하는지까지도 모조리 다 찾아내 수사라는 이름으로 협박할 수 있다. 사상 검증. 사적 감찰. 사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0.01% 정도의 범죄를 찾기 위해 99.99%의 감시를 합당화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힘의 대결이고, 배후의 이해 집단 간의 싸움이다. 보이지 않는 마피아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라는 인기투표를 하고, 반장이 될 친구에게 권한을 주고, 그 권한으로 떠든 사람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학창 시절과 전혀 다르지 않은 초등학교 수준의 사회 같았다.
어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만들어 세상에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가. "이제부터는 바보로 삽시다." 하고 모든 걸 잊고 바보로 살며, 돈을 벌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그저 세상은 이렇게 따뜻한 곳이야 하며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보며 뉴스를 끄고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이미 분노한 이 칼을 가지고 마음껏 세상을 향해 춤을 춰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쯤에서 내가 글을 브런치에 적는 이유도 적어두고 싶다. 브런치 스토리. 카카오의 서비스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이곳에 적어두었는데, 어느 날 이곳에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 참 볼만할 것 같다. 언젠가 역사가 이 시기를 비추는 날이 와서, 그것이 영화가 됐건 다큐멘터리가 됐건, 드라마가 됐건. 내 기록은 꽤나 재밌는 이야기가 되길 원하기에 난 굳이 이런 글을 이곳에만 기록해 둔다.
그렇게 나는 살고 있다.
내가 베고 싶었던 것을 정교히 베어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견디며,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