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30.
나는 한국에 큰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이들이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운동장과 축구장, 농구장. 그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가 내가 꿈꿔온 세상의 모습이다.
할 수만 있다면 숲을 만들고 싶다.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힘이 참 좋다. 숲이 생기면 생명의 근원이 되는 버섯과 같은 균들이 성장할 수 있다. 포자류의 성장은 주변의 새들을 부르고, 새들은 집터를 찾고, 씨앗을 퍼뜨린다. 작은 설치류와 포유류가 나타나고, 나무의 뿌리가 깊어지며 땅은 마르지 않은 물을 저장한다.
항상 그래왔다. 태양이 뜨겁게 비춰 모든 것들을 황폐하게 하는 곳을 떠올려보며, 그곳을 바꿀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잘하던 컴퓨터와 무관하게 연세대의 토목 관련한 과를 지원했던 것도 황폐화된 사막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해수 플랜트나 담수화 같은 시스템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보면 여전히 내 삶의 목적지는 비슷해 보인다. 나는 언제나 숲을 만들고 싶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고, 아이들이 하는 하찮아 보이는 공놀이가 가장 즐겁다. 그게 전부다. 나에겐 그보다 거대한 비전도 거대한 꿈도 없다.
대학 시절부터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많이 생각해 보았다. UN 난민기구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 조금이라도 기부를 하고, 헌혈을 하고, NGO의 일과 국제기관의 일을 공부했다. 대학교 3학년쯤은 식량 문제 해결이 안 되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농업을 공부하고 싶어 미국의 공개 강의를 수강하기도 했다. 미시시피 강이 미국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강이 농업에 영향을 끼친 내용에 대한 강의였다.
돌고 돌아 내 인생은 IT, 개발, 블록체인, 크립토 등으로 의도했던 것과는 아주 멀리멀리 달라져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목적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간절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인생에서 특별한 순간이 있었다. 한 번은 신년을 맞아 노인 분들께 인사를 드리러 다녔다. 한 집에 방문했을 때 그곳은 아주 허름한 집이었다. 10평도 안될 것 같은 작은 방에 할머니 홀로 살고 계셨다.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낡고, 외로운 집이었다. 두 뼘도 안 되는 작은 텔레비전이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구였다. 집을 보니 어떤 것을 드실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화가 잘 되는 죽이나 마른반찬 몇 가지로 삶을 이어가고 계셨을 것이다.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니, 할머니는 우리에게 양손 가득 귤을 쥐어 주셨다.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꼭 잡은 두 손에서 나는 여러 감정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귤이라도 한 상자를 사 와서 드리고 싶었는데, 도리어 귤을 꼭 손에 쥐어주시는 모습에 그것을 거절하는 게 더 예의가 아님을 느꼈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려는 이에게 이익을 따지지 않고 사랑을 베푼다.
인간은 가장 최선의 모습일 때 그 어떤 동물보다 위대하다고 했던가. 사랑이 사라진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저 공허한 쾌락을 좇는 괴물이 되어 알코올 중독자가 끊임없이 술을 찾듯 끊임없는 쾌락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은 사랑에서 빛을 발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위치와 상관없이 위대한 길을 택할 수 있고, 위치와 상관없이 초라한 길을 택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유일한 길과 자랑은 항상 동일하다. 나는 그들이 좋다. 사람들이 초라하다고 멸시하는 그들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쓸쓸히 사라져 가는 한 명 한 명이 나에겐 유명한 이들보다 특별한 인물이다. 예수는 너희 중 가장 보잘것없는 자가 자신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예수는 명품차를 끄는 인물도 아니고, 수백만 원의 시계와 양복을 걸치지도 않았다. 우리 곁에 영원히 있겠다고 하며 동시에 가장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곁에 있겠다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신을 섬기는 방법은 그렇기에 매우 간단하다.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 신이 머문다. 예수는 거대한 예배당에서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신의 자리에서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길바닥에 쓰러진 행인 곁에 있으며, 어미를 잃은 아이 곁에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바꿀 수 없는 이들 곁에 머문다. 지혜의 신은 어디에 있는가. 잠언의 저자는 말했다. 지혜를 누이라 부르라. 그러면 지혜가 찾아와 지혜를 주리라 말했다. 신을 간절하게 찾으며 애통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죽음의 그늘에서 사라져 가는 이들 곁에 신이 머문다.
우리는 대단한 것 같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시간은 30년이 채 되지 못한다. 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인간도 전성기를 지나 30년의 세월이 지나면 늙고, 연약해진다. 우리의 때가 나무와 같아서 겨울이 오면 모든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 속에서 사그라진다.
가난한 이들과 애통하는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 곁에 있다. 가장 많은 이들이 우리 곁에 있으나 볼 수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이들이 숨죽이고 살고 있는지를 방증하는 사실이다. 거대한 빛을 발하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만 손에 꼽고, 작고 초라해 보이는 이들은 찾기 힘들지만 끝없이 많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사라져 가기 전에 그 드넓은 땅에서 내 꿈을 펼쳐 보이고 싶다. 광활한 숲과 뛰어노는 아이들. 그것 정도가 내가 바라는 미래일 뿐이다. 만약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