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연극예술 및 퍼포먼스 연구 전공이 있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주기적으로 공연이 있는지는 몰랐다. 금요일 저녁에 잠시 시간을 낼 수 있어서 연극을 방금 보고왔고, 느꼈던 것을 정리하고자 쓴다. 평소랑은 달리 구체적으로 쓸거 같진 않다.
이 연극은 1920년대 루스 스나이더 보험금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소피 트레드웰이 1928년에 발표한 연극이다. 보기전에 어떤 연극인지 알고 들어갔는데, 표현주의 연극이라 평소에 내가 보던 브로드웨이 연극이랑은 달리 실험적인 면이 많기에 이에 대한 각오를 하고 들어가라는 언급들이 있었다. 다소 알아듣기 어려운 면은 있었지만, 이게 의도된 연출이었다고 나중에 들었을 때는 무언가 안도감이 있었다.
소피 트레드웰은 루스 스나이더 보험금 살인사건을 취재했지만, 당시 취재분위기에 대해 여성을 악마화해서 몰아가는 것에 상당히 불만을 가졌고, 그 생각을 희곡으로 표현해냈다. 주인공 헬렌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사회에 많은 불만이 있다. 첫 장면부터 담뱃불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고, 직장에 들어가나, 직장인들은 헬렌이 무능하고, 이상하다고 자기 틀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협조적이다. 같은 직장에서 남편이 헬렌을 따로 불러내고, 어느순간 둘은 결혼을 하는 상황에 놓인다. 헬렌은 엄마에게 찾아가 이 답답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헬렌은 결혼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는 있었지만 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밥은 제대로 안 먹고, 이야기는 안 들어주고 화만 낸다. 억양을 보니 엄마는 일을 하느라 바쁜 사람이라 자식의 마음상태를 신경쓰지 못하는 상태였고, 이미 아이는 어렸을때부터 마음속이 곪아버릴대로 곪아버렸다. 결혼은 했으나, 남편은 자신의 부탁, 숨막힌다는 부탁은 들어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신체접촉을 하고, 강압적으로 다룬다. 스위스에 가서 시계를 사면 좋지 않겠냐는 시덥지 않은 소리만 하고, 아내의 의견에는 관심도 없다.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의사와 간호사는 헬렌에게 모유수유를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헬렌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의사는 강압적으로 대하고, 헬렌을 둘러싼 모든 사람은 헬렌을 조롱하는 어조로 바라본다. 남편은 아내에게 멋진 남편이라는 이미지만 보이고 싶을뿐 안하무인인 것은 여전하다. 자신의 자식을 낳은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로 보지 않는다. 헬렌은 공포에 질려 단어들을 계속 내뱉기만 한다.
헬렌은 술집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와 연인이 된다. 그 연인은 멕시코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미국으로 넘어온 사람이다. 정상적인 사고는 아니지만, 둘은 사랑에 빠져 헬렌은 외도를 한다. 헬렌은 연인과 있을 때 비로소 자기다운 모습이 나온다. 노래도 하고, 공포에 잠식된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헬렌이 다시 집에 들어가서 남편과 신문을 같이 보지만, 남편은 자기가 관심있는 기사는 관심도 갖지 않고, 자기가 관심있는 기사만 크게 읽으며 아내가 읽도록 한다. 헬렌은 큰 달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고 하지만, 남편은 들은체도 안하고, 스위스에서 시계를 사면 멋지지 않겠냐, 이제 모기지도 끝나면 새로운 집이 생긴다는 말만 할 뿐, 아내는 신경쓰지 않는다. 아내는 그에게 트로피에 불과하다.
그리고 법정에서 헬렌의 살인혐의에 대한 심판을 한다. 변호사는 헬렌의 무죄를 위해, 헬렌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헬렌이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검사는 헬렌이 받은 이전 애인의 편지를 읽고, 헬렌이 읽지 말아달라고 외치지만 검사는 읽는다. 그리고 헬렌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이 죽였다고 말한다. 자유롭기 위해서 죽였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전기의자사형에 앞서, 신부는 축복성사를 해준다. 그러나 그 축복성사는 자기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하는 말이 아닌 형식으로만 느껴진다.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도 행정편의를 위해 머리가 잘리는 수모를 겪는다. 엄마가 면회를 왔을때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절규를 하나, 나중에 엄마랑 다시 안아서, 아이를 어떻게든 보살펴달라고 외친다.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는 계속 축복성사를 외치나, 전기의자가 작동이 되지 않는다. 헬렌은 "누군가 제발..."이라는 말을 계속 되뇌이다가 죽는다. 죽음 이후, 헬렌을 맞이하는 성가대가 나타나 모든 극의 인물들이 춤을 추며 극이 끝난다.
이 극은 기계문명에 둘러싸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둘러싸인 어떤 여성의 절규를 담은 연극이었다. 직장동료, 엄마, 남편, 의사, 그리고 법정의 모든 사람들까지, 헬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고 모두 억압하는 사람들 뿐이다. 남편의 트로피로서의 여자, 수유를 하고 싶지 않은 여자를 인정하지 않는 시선(강요된 여성 역할), 숨이 막혀 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시선, 그 안전한 안전기지로서의 역할을 했어야 하는 엄마와의 대화조차 아무도 헬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애인과의 만남은 분명 도의적으로는 지탄을 받아야 하겠지만, 헬렌에게 유일하게 숨구멍이 되주는 건 그 순간 분이었다. 살인을 저지름으로서, 모든 사회적 금기를 깨야만 자기다워질 수 있는 아이러니한 인물이었다. 종교적 구원조차 헬렌에게는 소음이었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헬렌은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없었고, 죽음을 맞이해서야 아이러니하게 행복해졌다 것이다. 모든 억압에서 해방된 그 순간을 헬렌이 행복한 모습으로 춤을 추며 마무리 되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죽음조차 기계적이었지만, 죽음덕분에 기계적인 세상으로부터 해방이 된 것이다.
이 연극을 2시간동안 관극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반복되는 대사도 그렇고, 무엇인가 대사가 내가 쓰던 영어랑 달라서였던건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보름달을 무서워하는 모습, 이것에 무슨 상징이 있을거 같진 하지만, 보름달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그 작은 몸부림조차 남편이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 정도로 이해하고 넘겼다.
극은 여성의 억압을 다루었지만, 나에게도 무엇인가 가닿았던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특이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다. 지금도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명확한 기억이 없다. 학교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건, 그만큼 내가 나의 마음을 억누르고 살았던거 아닐까 싶다. 대학에 와서야 내가 숨을 쉬기 시작했고, 대학에 다녔을 때의 기억은 하나씩 지금도 생생한 것을 보면, 내가 나 다워지기 시작한 순간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연극은 평소에 인물들의 첨예한 갈등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인물을 탐구하는 걸 좋아하는 나의 스타일하고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된 대사라던가, 주변의 지루한 대사들을 통해 헬렌의 복잡한 마음을 연출했던 걸 생각해보면, 이 연극을 보는 시간이 적어도 아깝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