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학의 탄생

권위로 상대를 찍으려고 했던 추잡한 뉴턴

by Will


이번학기에 조교로 또 편미분방정식 수업을 맡았다. 이번에는 수학사에 관련된 에세이를 덧붙이는 걸로 강사랑 합의를 봤고, 내가 나름대로 쇼트 에세이를 작성해서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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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여러분이 수학 또한 수많은 드라마와 학자들간의 격렬한 토론을 통해 탄생했다는 걸 느끼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수학자들이 어떻게 이론을 발전시켰는지, 그 주변의 논쟁들, 그리고 이론의 전파 뒤에 숨겨진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수업과 관련된 역사적으로 네 가지 주요 논쟁이 있습니다:


1. 미적분학의 창시


2. 달랑베르(d'Alembert) 공식에 기반한 함수의 정의


3. 푸리에 분석(Fourier Analysis)의 수학적 정당성


4. 충격파 형성, 물리적 해는 연속적이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미적분학의 창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수많은 드라마가 얽혀 있으며, 인간의 오만이 학문적 환경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1. 뉴턴 vs 라이프니츠, 누가 먼저 미적분학을 만들었는가?


1670년대에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적분의 개념은 아르키메데스 시절부터 널리 퍼져 있었지만, '미분'의 발명과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의 발견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증명해낸 획기적인 업적입니다. 라이프니츠는 페르마의 결과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뉴턴은 배로(Barrow)의 《기하학 강의(Lectiones Geometricae)》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연구결과의 가장 큰 기여는, 기존의 수학이 기하학적 논법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방법은 대수적 해결법에 주목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등가속도 운동을 기하학적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당시에도 가능했지만(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랬듯이), 그 방법은 특정 상황에 매우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미적분학의 발명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실제로 계몽주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뉴턴은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연구했지만, 라이프니츠의 동기는 달랐습니다. 그는 수학적 문제 해결에 집중했으며, 이는 현대적인 토론의 개념과 더 밀접합니다. 그는 더 직관적인 표기법을 고민했고, 그를 위해 뉴턴의 점(dot) 표기법보다 훨씬 직관적인 $dx$나 인테그랄($\int$) 같은 편리한 표기법을 고안하려고 노력했습니다.스트로가츠(Strogatz)의 저서에서는 뉴턴이 왜 자신의 결과를 더 일찍 발표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당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후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도입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등 여러 천체 현상을 규명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2. 뉴턴의 반응과 '잃어버린 세기'


문제는 과학적 논쟁에 대처하는 뉴턴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자신의 관찰 내용을


"6acccdae13eff7i3l9n4o4qrr4s8t12ux"라는 암호로 적어 보냈습니다. 이는 오늘날"임의의 미지수를 포함하는 방정식이 주어졌을 때, 변화율을 구하라: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라고 번역되며, 그가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했음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작업에 관심을 공유했습니다. 소통과정에서 뉴턴은 급수 전개에 관한 지식을 자세히 공유했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암호로 남겨두었습니다. 그 후 라이프니츠는 적분 표기법과 무한소 표기법($dx$)을 도입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적분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뉴턴이 미적분의 기본 원리를 먼저 발견한 것은 사실이나, 라이프니츠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도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뉴턴과 라이프니츠 사이의 역사적이고 치졸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뉴턴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먼저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편지와 저작물들을 읽고 적절한 인용 없이 표절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암호를 해독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익명으로 논문을 써서 자신의 관찰과 뉴턴의 것을 비교하며 방어했고, 사적인 대화에서는 뉴턴의 업적을 진심으로 높게 평가했습니다.


반면 뉴턴은 왕립학회 내에서의 권위와 학문적 지위를 이용해 라이프니츠를 표절로 비난하고 그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오늘날 이 보고서는 뉴턴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이전에 로버트 훅(Robert Hooke)을 괴롭혔던 전적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가 나타나기 전까지 영국에서는 그 누구도 라이프니츠의 표기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가 코시, 리우빌, 라그랑주, 라플라스, 푸리에 덕분에 수학적 해석학에서 거대한 진보를 이루는 동안, 영국은 현대적 해석학 도구가 발전하기까지 100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배비지의 노력 덕분에 조지 스토크스와 제임스 맥스웰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중요한 방정식과 정리들을 도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가 라이벌을 비하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오용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초석을 놓았던 과학적 진보 자체를 가로막았다는 사실은 깊은 아이러니입니다.


참고 문헌


1. C. S. Boyer, The history of the calculus and its conceptual development, Dover, 1949.


2. 스티븐 스트로가츠, 《미적분의 힘》, 2019


3. How Charles tried to oust Isaac from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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