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우면서도, 안타까우면서도, 특이한 동화
박찬욱 감독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 되고, 대표작들이 하나씩 편집돼서 보여주는 영상이 있었다. 그중에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작품이 안 보였다. 지인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대한 인스타그램 스토리 포스팅을 한 것을 보고 궁금해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아마 작중 총기난사장면 때문에, 라이센스 수입조차 안 한 걸로 추정한다...) 미국에서는 어떻게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지만, 어렵게 그 영화를 구해 보았다. 박찬욱 감독이 자기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는데, 그걸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관람했다. 이 작품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답게, 연극 같은 느낌이 드는 등장인물들로 가득한 영화였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분위기가 아닌, 뭔가 엉뚱한 색감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싶었다.
영군은 자신을 사이보그라 믿으며, 밥을 먹지 않는다. 건전지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건전지를 핥는다. 할머니의 틀니를 껴서 기계들과 소통을 한다. 영군은 커피자판기에게 말을 걸면 율무차가 나온다고 믿고, 형광등과 대화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병원선생님들에게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병원 선생님들은 영군을 돕고 싶으나, 왜 밥을 먹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반면 일순은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물건들을 훔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가면을 쓰며 돌아다니고, 양치질에 집착한다. 일순은 영군이 눈에 끌린다. 병원선생님들이 없을 때면 각종 기계들과 대화하고 있는 영군을 본다. 그리고 영군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가 자신은 사이보그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느낀다. 영군이 밥을 먹지 못해 독방으로 입원하니, 자기도 독방으로 난동을 피워 입원한다. 그리고 영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씩 이해하려고 하는 일순이다. 일순은 영군이 밥을 먹지 않는 것이 신경 쓰인다. 자기가 원망하던 엄마의 장신구를 개조해서 영군에게 "음식을 먹으면 에너지원으로 바꿔주는 기계를 만들었다"라고 보여주며 수술을 해준다. 영군은 그동안 밥을 먹지 않았으니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밥을 먹다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하냐. 언젠가 고장 난 다면 어떻게 하느냐. 일순은 "평생 AS 해준다"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영군은 밥을 드디어 먹고, 영군이 에너지 충전해야 한다고 번개를 맞으러 가야 한다는 말에도 동행하며 서로를 품고 영화가 끝난다.
소재만 보면 정신병원에 입원한 거식증 환자와 도벽증 환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도벽증 환자가 거식증 환자에 망상에 동참하는 영화다. 그러나 소재에 집착하면 이 영화가 알려주고자 하는 바를 잡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2006년에 다양성을 지금도 존중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인지, 정말 대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미국에 유학 와서 여러 일을 부닥치고, 2008년에 상영된 뮤지컬 Next to normal을 본 이후에야 이 영화를 봤기에,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좋았던 거지, 그때의 나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들고 계속 봤기 때문에 이 영화가 전달하고 싶었던 따스한 메시지가 와닿았다.
영화를 보며 크게 4가지에 주목했었다.
1. 무엇이 진짜 관심일까?
일순은 영군이 <칠거지악>을 외는 것을 보고 일순이 영군에게 "너의 감정을 훔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일순은 영군을 위해 음식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장치를 만들어 몸에 이식해 주겠다며 망상에 동참한다. 일순은 작중에서 자기 발로 여러 번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으로 나온다.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가도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다시 정신병원에 돌아온다. 병원선생님과 일순, 그리고 영군의 엄마 모두 영군이 밥을 먹기를 소망한다. 병원선생님은 따스한 시선으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며 환자들에게 접근한다. 영군의 엄마는 순대를 만들며 생계를 이어 나가며, 영군에게 순대를 먹이려고 한다. 엄마의 눈빛이나 행동을 보면, 무엇인가 어그러졌다는 인상은 확실히 느껴진다. 그러나 일순의 시도 후에 영군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일순은 기계만 만든 게 아니다. 일순은 영군의 망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틀니를 껴서 자판기와 대화해 보려고 하고, 영군이 영양실조로 독방에 갇힐 때 자기도 난동을 피워 영군의 옆 독방에 갇힌다. 그리고 종이컵 전화기로 소통한다. 일순이 영군의 감정을 훔친 후, 영군은 에너지가 넘친다며 총기를 몸에서 꺼내며, 병원의 선생님들을 모두 죽이는 상상을 한다. 영군은 선생님들 앞에서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일순의 도움으로 자기감정에 더 솔직할 수 있던 거다.
더불어 영군의 기이한 행동의 원인이 될 법한 사건들을 추론할 수 있는 배경들이 나오는데, 자기를 키워준 할머니는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며 틀니를 끼고 무를 갉아먹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엄마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자신을 신경 써줬던 할머니와 생이별을 한다. 가족력을 보여주면서 운명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엄마는 '밥만 먹으면 돼. 사이보인가, 그런 거 말 하지만 않으면 돼'라고 말하며 영군이 왜 마음이 아픈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각자의 방법으로 영군을 이해하려고 하나, 엄마와 선생님 모두, 자기를 기준으로, 또는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그러나 일순은 그러지 않았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가 사랑의 시작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싶었다.
2. 영군은 당연히 사람이다. 그런데 왜 로봇으로 되는 연출이 계속 나오는 이유가 뭘까?
이 영화는 연극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군은 자신을 사이보그라 믿는다. 발가락의 색깔이 모두 생겨야 에너지가 생긴다고 믿으며, 로켓처럼 날고, 그리고 점프능력도 있고, 몸에 내장된 총으로 사람을 죽인다. 우악스러운 CG로 그 장면이 연출된다. 어색해 보이긴 하는데, 사실성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몸에 내장된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그간 억눌러 왔던 분노, 특히 할머니를 잃은 것에 대한 분노, 자기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느껴졌다. 극 중에서 일순과 키스할 때 일순은 키가 작아지고, 영군은 로켓 에너지를 분사시켜 눈높이를 맞춘다.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다가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군이 왜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상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었고, 일순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기에, 영군이 마음을 연 장면으로 느껴져서 귀여웠다.
3. 왜 일순은 마스크를 끼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작품을 본 당시에는 답을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일순은 영군 앞에서만 어느 순간부터 마스크를 벗고 있더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스크를 끼고 살고 있지만, 영군 앞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 일순은 작중에서 키가 작아지기도 하고, 자기를 안티소셜이 아니라 안티소멸이라고 외친다. 이 잘 닦으라고 엄마가 말을 해놓고는 전동칫솔을 다 가져가고, 그것에 대한 분노와 충격으로 자기가 소멸당할 두려움을 갖고 산다. 그러나 그 일순은 영군의 무엇인가에 끌려, 영군을 이해하고, 영군은 일순에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상황은 작품이 끝나가는 시점에도 여전히 아니지만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래서 일순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마스크를 써도, 영군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스크를 벗은 거 아닐까 싶다.
4.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이 말을 하는 영상을 보고, 이 영화를 어떻게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궁금했었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참으로 기괴한 말 구성이다. 희망을 버리라고 말하는 비관적인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만'이 아니라 '그리고'다. 무엇에 대한 희망을 버리라는 걸까? 염세적인 문구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사니까 밥을 먹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던데, 그런 말로 느껴지진 않았다. 적어도 나는 (정상이 되겠다는) 희망을 버려. 그리고 (우선 살아가는 인생이니) 힘내자.라는 말로 느껴졌다. 아마도 <Next to Normal>이란 작품을 보고 난 후라 그런가. 그 작품에서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엄마로 인해 가족이 붕괴되는 모습, 그리고 그 가족이 치유해 나가는 모습이 나온다. "정상은 될 수 없겠지만, 그 옆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희망을 찾으며 희망적인 노래로 곡이 끝난다. 정상이라는 것은 없고, 서로가 엉망인 걸 보듬고 나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힘내라는 말로 느꼈다.
미적인 감각을 캐치해서 풀어낼 수 있는 언어적 감각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에 드는 것들도 많았는데 그걸 언어로 풀어낼 재능이 없다. 색의 선택이라던가, 꽃밭 속에서 걸어가는 모습, 초원에서 만나는 것들, 할머니가 고무줄에 매달리는 것. 이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괜찮다. 라디오 안테나에 무슨 의미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장치로는 마지막에 번개 맞을 때 그 작대기랑 연상돼서 복선을 깔아 둔 건가?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만 이유는 아닐 텐데 뭔가 담겨 있는 걸까 그냥 배경인 걸까?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들으려고 하는 걸까? 여러 생각은 맴돌지만 나 스스로 답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2006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게 놀랍다. 2008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Next to Normal>이 비슷한 시선에서 만들어진 작품이고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다. 한국에는 2011년에 들어왔고, 뮤지컬 팬 층을 중심으로 많이 화제가 된 걸로 안다. 그러나 과연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2026년에 한국에 개봉해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 SNS 시대를 거치며 오히려 강해졌기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옛날에 봤으면 다른 생각도 해 봤겠지만, 지금 봤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소중한 영화였고,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라는 말을 내 홈페이지에서 좋아하는 인용구 중 하나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