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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Aug 02. 2023

과거로 돌아가는 영웅,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왕』을 읽어보기

1. 들어가는 말


 인류 역사상 언어가 탄생한 이래로 수많은 텍스트들이 등장했다. 현재는 평생을 텍스트와 씨름해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텍스트들이 누적되었다. 이 누적된 텍스트들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사라지거나, 아직까지 살아남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도 한다. 아직도 읽히는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검증이 끝난 훌륭한 텍스트라는 말과 같은 뜻이리라. 그랬기에 우리는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수없이 많은 텍스트가 태어나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라면 검증이 끝난 텍스트, 즉 고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텍스트가 있다. 그중에서 바로 고전 중의 고전 『오이디푸스 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문학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 두 번쯤 들어보았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단어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사랑한 고전으로도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 도대체 왜 프로이트는 이『오이디푸스 왕』을 사랑했던 것일까? 지금부터 이 고전의 문을 두드려보기로 하자.     


2. 사건, 이미 벌어진


 오이디푸스가 등장한다. 그가 등장하면서 어떤 불행이 그가 다스리는 테베를 덮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라이오스 선왕의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완결된 상태에서 오이디푸스를 등장시킨다. 오이디푸스가 모든 사건이 일어난 후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의 근원적인 한계에 맞닿아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한계 말이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남들과 다른 또 하나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 신탁이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기 전부터 신탁을 받았다. 그 자신의 운명이라 할 수 있는 신탁 말이다. 그 신탁의 내용은 “나는 내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사람들에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며,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본문 791~793행)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상태에서 등장한 인물에 불과하다. 자신의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도대체 이 인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운명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기 이전에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할 듯싶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이디푸스에게는 이 ‘부은 발(오이디푸스)’이 하나의 상징-증상처럼 보인다. 그의 발은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에 의해 두 발이 묶여 버림받은 후에 생긴 일종의 상처와 같은 것이다. 아버지에 의해 발이 묶인 덕택에 그의 발은 부어버렸고, 이 ‘부은 발’이 그의 이름이 ‘오이디푸스(부은 발)’인 이유와 더불어 그의 운명을 상징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태양신에 의해 발-오이디푸스이자 그의 운명-이 묶인 인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많은 소설 속 인물들의 특징인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을 가진 인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그의 운명이며, 눈에 보이는 상징이자, 다시 되돌아가게 되는 증상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을 ‘문제적 개인’이라는 용어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문제적 개인’은 자기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 결말을 알고 있던, 모르고 있든 간에 말이다.

 여기서 오이디푸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고, 그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이 작품에서 던져야 할 것이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3. 질문, 과거로의 회귀


 이제부터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다. 왜? 그의 발은 묶여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발은 그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시간은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로 돌아가 최종적인 사건-아버지를 죽인-의 파급력은 매우 강력하게 되돌아온다. 이것은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되돌릴 수 없다. 개인 삶의 변곡점이 되는 어떤 일들을 우리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들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것이 되기도 하는데 이전의 세계와 구분하는 절단선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사건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되돌리는 순간, 몰락할 수밖에 없기다. 사건의 진실은 한 개인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사건’으로 오이디푸스는 돌고 돌아 복귀한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이 ‘사건’의 복귀는 본인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성취한다. 


 “어떤 부모 말인가? 게 섰거라. 인간들 중에 누가 나를 낳았지?/바로 오늘이 그대를 낳고 그대를 죽일 것이오.”(본문 437~438행)

 

 이 말처럼 오이디푸스는 누가 자신을 낳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운명이 성취되는 순간은 바로 오늘이다. 오이디푸스는 과거에 묶여있으나 현재에 살고,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신탁 때문이다. 결국 그는 현재/오늘에 그의 과거/사건이 복귀하는 순간 이 신탁이 성취되어 있음을 밝히고 몰락한다. 이 몰락의 순간,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위가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신탁으로 들어가는 방법임을 알지 못했다. 이미 사건은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신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하는 방법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확인의 과정이 ‘사건’의 복귀이며, 과거로의 회귀인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인하고 있었던 이유가 다시 한번 그의 묶인 발에 있다고 지적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이 될까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과거에 묶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테베로 향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코린토스에서 테베로 넘어가는 이 상황 하에서 도대체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할까? 지역적으로 코린토스의 인물이 테베로 넘어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오이디푸스가 꼭 테베에 갈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간다. 둘째, 그 길에서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쳐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쳐 죽인 이유다. 길을 막아섰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어 친아버지를 쳐 죽인다. 이게 이해가 되는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 떠났다. 오이디푸스에게 양아버지인 플뤼보스가 친아버지이라고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살해할까 두려워 길을 떠났다. 여기서 친아버지 라이오스와 마주친다. 부자 관계는 이중적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이 마주침이 ‘사건’을 발발시킨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매우 묘한 관계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자기 인생의 모델로 삼는다. 이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삶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부자관계는 이중적 자아(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이중적 자아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다른 텍스트를 통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은 오이디푸스의 가문, 라브다코스 가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라이오스는 아폴론 신에게 자식을 낳지 말 것을 경고받는다. 이것은 라이오스가 저지른 죄 때문인데, 그는 젊었을 때 펠롭스 왕의 막내아들을 납치해 강간한 적이 있다. 막내아들은 자살을 하고 펠롭스 왕은 라이오스를 저주한다. 결국 이 “죄”가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를 같이 처벌한 것이다. 여기서 라이오스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오이디푸스가 대신 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라이오스가, 책임은 오이디푸스가 진다. 바로 이런 지점이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를 이중적 자아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로 볼 수 있다면, 여기서 라이오스를 쳐 죽인 것도 사실 이해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와 마주친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살의를 느낀 것은 아닐까? 분신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만들어진 설화 도플갱어를 떠올려보자. 자신의 분신을 발견하는 순간 살의를 느낀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고전적인 논법을 끌고 들어오면 라이오스를 살해한 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을 죽인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간신히 살아나 코린토스로 넘어간 순간 오이디푸스가 아닌 것이다. 그랬기에 그가 테베를 선택하고 라이오스를 살해한 것은 오이디푸스가 진정한 오이디푸스로 거듭나는 순간이 아닌가? 이 선택들은 오이디푸스의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말이다. 결국 신이 직접적으로 한 일이라고는 신탁을 내려주고, 테베에 역병이 돌게 한 일. 딱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이 신탁을 이룬 것은 인간,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이 둘이다. 이 둘은 다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된다.     


 4. 응답, 자기 처벌의 세계로


 오이디푸스의 몰락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운명은 과거에서 돌아온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몰락한다. 그런데 그가 행한 모든 행위는 자기 스스로 알고 행한 행위가 아니다.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모른 것일까? 이것을 무의식적 차원에서 행한 것이다,라는 논법으로 읽어 들인다면 과연 정말 모른 것일까?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의식적인 차원에서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해 자신의 의식은 그 사실에서 눈 돌린 것은 아닌가? 그랬기에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몰락한다. 이 몰락이 의미심장한 것은 알고 행했든, 모르고 행했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책임질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개인이 질 수 있는 책임도 그리 얼마 되지 않는다. 책임질 일도, 책임질 수도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결말은 모든 것을 끌어안은 영웅적인 행보가 아닌가? 자기 처벌은 어찌 되었든 영웅적 몰락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대가, 사회가 자신을 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내려지는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오이디푸스가 진정한 오이디푸스가 되는 순간, 그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순간, 괴물 같은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 운명은 오이디푸스에게 단 한순간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오이디푸스는 철저하게 몰락한다. 이 몰락의 정점은 눈을 찌르는 자기 처벌에 있다. 그리고 이 자기 처벌은 신조차 예언하지 못한 영역이다. 신의 예언은 그가 어떤 죄악을 행하게 될 것이다, 까지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스스로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신조차 예언하지 못한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 지점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 즉, 자기 행동의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도 오이디푸스 스스로 자초한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내린 저주가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운명에서, 자신이 내린 저주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 자기 처벌은 행위 주체로 다시 태어난 오이디푸스를 우리와 대면하게 한다.

 오이디푸스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한다. 코린토스에서 테베로 넘어가면서, 그리고 자신의 눈을 찌르면서 그는 자신을 완성한다. 코린토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가 아니었다. 그가 오이디푸스라는 자신의 운명으로 뛰어든 것은 테베로 넘어가면서부터다. 여기서부터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가 신이 조종한 것이든, 무지에 의해 저지른 짓이든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행위이자, 상징이며, 반항이다.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 자기 주체성을 획득한 것은 완벽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한 응답,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응답, 오이디푸스의 선택은 자기 처벌로 행하는 몰락이다.     


 5. 마치는 말


 오이디푸스는 몰락하는 순간에야 진정한 영웅이 된다. 그의 정체성은 그가 몰락하면서 공고해진다. 그가 테베로 돌아온 순간, 진정한 오이디푸스가 됐다면, 그 오이디푸스가 몰락하는 순간 진정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서사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책임지게 행동의 주체로 태어날 수 있다는 응답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도, 죄악도 사실 오이디푸스가 온전히 책임져야 할 것들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죄도, 자신의 운명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간다. 운명이 성취된 순간에야 오이디푸스는 이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슬프다면 슬퍼해도 되리라. 그러나 이제 한 고달픈 인간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주체로 태어나는 바로 이 역설을 바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이디푸스가 영웅인 이유이자 감동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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