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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Aug 02. 2023

분신, 욕망의 화신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읽기

1. 들어가며 


 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요즘 소설들 왜 이렇게 끔찍해? 또는 요즘 시들은 이해를 못 하겠어, 무슨 뜻이야?입니다. 저도 느낍니다. 요즘 시들은 너무나 어렵고, 소설들은 너무 끔찍한 장면들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 놈의 문학작품들은 왜 그리 어려운지, 읽기도 힘들뿐더러 알아먹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작품들이 주목을 받고 심지어 현대 정신사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지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작품들이 아직도 살아남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내가 바본가? 저는 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있을 지경입니다. 우선 우리가 시작하기 앞서 알아야 할 것은 문학은 예술과 인문학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재밌고 가볍게 느껴지고, 그렇다고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지독하게 학문적인 냄새가 납니다. 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우리는 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서 소설은 근대에 들어서 등장한 장르입니다. 문학 장르 중에서 최근에 등장한 장르입니다.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소설가 임철우의 이야기를 빌리면 소설은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가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한다면 소설은 나와 타자의 관계, 나와 세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장르라는 것이지요. 첫 시작부터 좀 어렵게 시작하네요. 

 이제부터는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해보지요. 다들 도플갱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셋이 존재하고, 나와 똑같은 사람과 만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죽고 만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이야기로만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사실 그 안에 매우 중요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분신’입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 분신이 이 세계 어디선가 돌아다니고 의도하지 않은 어떤 순간에 우리는 서로 마주치게 됩니다. 마주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죽고 맙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존재까지 파멸하고 맙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단순한 파멸? 죽음? 어떤 환상적인 이야기? 우리가 읽은『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니콜라이 고골이라는 작가가 보여준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이며 어떤 비밀을 감춰두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2. 내 신체가 살아 움직인다! -「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코’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꼬발료프가 자신의 ‘코’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 ‘코’를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야기가 소설「코」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도대체 왜 ‘코’가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중요하지도 않고요. 다만 이 ‘코’가 어떻게 인격을 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전에 우리의 주인공 꼬발료프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니라 자기 관등에 맞는 적당한 직업을 구해보려고 올라왔다. 만일 가능하다면 부지사나 그게 안 되면 훌륭한 관청의 감찰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꼬발료프 소령은 결혼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지만, 다만 상대방이 20만 루블의 지참금을 가져오는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중에서

     

 결혼도 ‘20만 루블’이라는 지참금이 있어야만 가능한 사내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꼬발료프라는 인물입니다. 이 얼마나 욕망에 솔직한 인물입니까? 사실 뻬쩨르부르그라는 도시 자체가 바로 이런 인물들로 가득 찬 도시입니다. 유럽 사회에서 가장 후진국가로 평가되던 러시아가 계몽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도시가 바로 뻬쩨르부르그입니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이자, 19세기 당시 러시아 사회의 퇴폐성과 부패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도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작가 니콜라이 고골은 뻬쩨르부르그를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 뻬쩨르부르그를 그는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뻬쩨르부르그에서 ‘코’가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코’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 중에 가장 눈에 잘 띄는 부위입니다. 그리고 종종 남성의 성기로 비유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꼬발료프도 자신의 ‘코’를 찾아 헤맵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꼬발료프는 ‘코’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위축되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코’가 꼬발료프 자신이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분신’이라는 테마로 보자면 ‘코’는 꼬발료프 자신과 꼭 닮은 존재인 ‘분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분신은 조금 다른 형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플갱어의 이미지가 현대에 와서 완성되었다면 19세기의 사람인 고골이 생각한 ‘분신’이라는 테마는 약간 다른 형태로 등장합니다. 내 신체 중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사람 행세를 하는 분신,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우선 ‘코’가 어떻게 인격화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코’가 살아서 움직이고 말도 하는데 주변인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바로 제정 러시아 시대의 병폐였던 관등제 때문입니다.     

 

모자의 깃털 장식으로 보아 5 등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중략)……

 “물론 저는…… 이렇게 말하는 저는 소령이올시다. 소령인 제가 코를 떼어놓고 다닌다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닙니까? 보스끄레센스끼 다리 위에서 껍질 벗긴 오렌지를 팔고 있는 여자 장사꾼이라면 코 없이 앉아 있어도 무방하겠지요. 그러나 조만간 틀림없이 현의 지사 자리에 앉게 될 인물이 이래서야 어디 말이 됩니까……

 ……(이하 중략)

 “……귀하는 바로 제 코가 아닙니까?”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중에서

     

  ‘코’와 마주친 꼬발료프는 ‘코’가 자신보다 높은 관등인 5등관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꼬발료프는 5등관인 ‘코’가 자신의 ‘코’임을 확신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코’가 자신보다 더 높은 관등이기 때문입니다. ‘코’는 5등관이기 때문에 그 밑 관등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코’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꼬발료프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렇기에 ‘코’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더욱 재밌는 것은 꼬발료프가 바라는 모습으로 ‘코’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높은 관등과 직업을 갖고자 하는 꼬발료프가 원하는 모습을 ‘코’가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코’가 꼬발료프의 욕망을 대신 실현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를 줍니다.

 물론 이 ‘코’는 나중에 꼬발료프의 얼굴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꼬발료프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고 단지 돌아온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고 맙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작가는 이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더 이야기할 것이 남아 있지만 뒤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2.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하여 -「외투」


 작가가 써 내려간 단편 중 가장 마지막에 써 내려갔던 단편「외투」는 러시아 문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품입니다. 이야기만 파악하면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외투를 얻었다가 잃어버렸고, 그 외투를 되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다가 사라진다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외투’입니다.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 ‘외투’는 욕망의 대상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절대 소유할 수 없습니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다고. 이 이야기에 잠깐 라캉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삽입해 보겠습니다. 주체의 욕망은 절대 소유 불가능하기 때문에 끝이 없다고.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E 라캉』, 웅진 지식하우스, 2005, 58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끝없이 욕망하다가 결국 파멸하게 되지요.

「외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자신의 ‘외투’를 가질 수 없습니다. 결국 죽음/파멸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게 됩니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에 다시 ‘외투’를 ‘분신’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새 ‘외투’를 입은 그 순간, 주변인들에게 전혀 다른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아니 사실은 전혀 존재감 없는 인물에서 새 ‘외투’를 입으며 하나의 존재감을 부여받게 되지요. ‘외투’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 새로운 인격을 부여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투’를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분신으로 파악할 수 있고, ‘외투’의 분실은 ‘분신’의 소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투’를 분실한 순간, 우리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죽음에 다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신의 소멸이 주체의 소멸로 이어지는 구조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에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선에서 ‘분신’의 테마로 읽히는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투’라는 욕망의 실체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주체를 뒤흔드는 ‘분신’으로 다시 재구성됩니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죽음/파멸에 이르러서야 불완전한 주체에서 완전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 사회의 부조리성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령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고위직 인사의 외투를 빼앗고, 공포에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고위직 인사의 ‘외투’를 뺏은 후에 유령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고위직 인사의 풍모를 그대로 닮은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것은 ‘외투’만이 ‘분신’인 것이 아니라, 고위직 인사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도 서로가 서로의 ‘분신’이었음을 뒤늦게 파악하게 해 줍니다. 첫 번째 분신 ‘외투’를 잃어버리고, 두 번째 분신인 고위직 인사를 마주침으로써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나는 누구인가? -「광인 일기」


 정신분열증이라는 정신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망상, 환청, 와해된 언어 등의 특징을 보입니다. 우리의 뽀쁘리시친이 보여주는 증상은 바로 이 정신분열증의 증상과 같습니다. 개의 언어를 듣고(환청), 자신이 스페인의 왕이라고 생각(망상)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와해된 언어)을 지껄입니다. 그가 이렇게 완벽하게 미치게(!) 된 것은 진실을 알고 나서입니다.

 국장의 딸, 소피 아가씨를 사모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서서히 미쳐갑니다. 이는 주인공 뽀쁘리시친이 진실을 견디지 못해서 미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가 소피 아가씨와의 사랑이라는 환상을 꿈꿨기 때문에 진실에 도달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분신’이라는 테마는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고 대결하는 구도로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앞에서 말한 도플갱어에 대한 민담도 그렇기 때문에 마주치는 순간, 서로가 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실 욕망이라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알아챌 수 없습니다. 알아챈 순간에는 돌이킬 수 없지요. 그러나 소설이라는 장르는 우리의 욕망이 살아 움직이게 하고 우리 눈앞에 들이밀지요. ‘분신’은 나와는 다른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분신’을 죽이는 순간, ‘나’도 죽게 됩니다. 이런 장면은 아카데미 수상작이었던 영화 <블랙 스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끝없이 욕망하지만 우리는 욕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없이 욕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뽀쁘리시친도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사회성의 상실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지요. 인간은 언제나 두 번 죽습니다. 상징적으로 한 번 죽고, 실제로 죽습니다. 두 번의 죽음을 거쳐야만 인간은 죽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존재들이 실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상징성이 죽은 존재들, 뭐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지요. 반대로 실제로 죽었으나 그 상징성이 살아 있는 존재들, 예수나 이순신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경우 상징성이 소멸된 살아 있는 존재로 뽀쁘리시친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도시 뻬쩨르부르그에서 존재감이 삭제된 인물인 것입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물론 자신의 ‘분신’인 ‘욕망’이라는 진실을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더 재밌는 것은 그가 이 소피 아가씨와 도저히 결합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그가 보여주는 행동들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피 아가씨와 현실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스페인의 왕이라는 ‘환상’을 꿈꾸고 주체성을 잃어버린 ‘분신’으로 화합니다. 그는 욕망하는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욕망의 화신, ‘분신’이 되고 나서 그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뻬쩨르부르그라는 현실이 아니라 갇힌 공간, 정신병동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에서 뽀쁘리시친은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없습니다. ‘주체’와 ‘분신’ 그 경계를 알 수 없게 되지요. 섬뜩한 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뽀쁘리시친의 모습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에 있지요. TV라는 대중매체와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는 소비를 부추기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TV에서 보여주는, 또는 여타 다른 매체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저들의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저들의 이야기를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이 소유하고 소비하고 싶은 욕망마저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이 사회의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사회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5. 내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초상화」


 여기 가난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재능이 있는 예술가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에 너무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예술가가 어떤 ‘초상화’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상화’, 이상합니다.     

 초상화의 존재와 자기 자신의 존재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초상화를 입수한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숙명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초상화의 액자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예술가와 ‘초상화’가 서로 같은 존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맞습니다. 이 ‘초상화’는 일종의 거울이라고 보시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고 부채질하는 거울일 것입니다. 어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더 잘나 보이고, 어떤 거울은 더 못나 보입니다. 예술가의 욕망을 보여주는 거울인데 이 거울에서 보여주는 예술가의 모습이 살아서 제 주체를 잡아먹는 ‘분신’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잠깐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한 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지요. 거울이 있습니다. 내가 거울 앞에 섰고 거울에는 내 모습이 비칩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돌아서는 순간, 거울 안에 있는 나는 돌아서지 않고 나를 살기가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고 있습니다. 이런 게 진짜 공포 아닐까요? 갑자기 어디서 귀신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그림자가, 나의 ‘분신’이 나를 죽이려고 어디선가 노리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 ‘초상화’는 예술가를 그렇게 노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해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것이 이 ‘초상화’의 잘못일까요? 아니 ‘초상화’만의 잘못일까요? 이것은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는 것에 우리는 주의하도록 합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 인간 내면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분신’이라는 테마는 인간의 욕망이 살아 움직이게 해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가를 고발하는 소설적 장치 중 하나입니다. 근대 이전 낭만주의 시절에는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에 대한 낙천적 인식이 숨어있었다면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에 대한 자기반성을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의 경우가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인간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인식을 보여줍니다. 자, ‘초상화’를 통해 예술가는 아직까지 알아채진 못했지만 자신의 모습을 마주쳤고, 자신의 고난이었던 금전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납니다. 그다음 그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한 번의 타협이 두 번의 타협을 부르고 점점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욕망에 잡아먹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명예라는 것은 노력에 의해 얻어지지 않고 그것을 훔친 자에게는 즐거움을 가져오지 못한다. 명예는 그것이 합당한 자에게만 늘 가슴이 뛰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르뜨코프는 기분이나 충동이 완전히 황금으로 쏠리게 되었다. 황금이 그의 정열, 이상, 공포, 즐거움, 목적이 된 것이다. 돈궤 안에 지폐 다발이 부쩍부쩍 늘어나 이 무서운 하늘의 선물을 받은 운명이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금화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재미없는 금화만이 목적인 깍쟁이, 사리분별이 없는 수전노가 되어, 이 냉혹한 세상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생명과 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 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심장 대신 송장이 들어가 있어, 움직이는 돌로 된 관처럼 보이는 기괴한 생물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그의 삶을 온통 심하게 뒤흔들어 깨웠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중에서

    

 자 보십시오. 이 장면에서 예술가 차르뜨코프는 이미 죽은 자와 다름 없어졌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충족시키고자 움직이는 주인공 차르뜨코프는 이제 죽은 것입니다. 이전의 재능 넘치고 열정 넘치던 예술가 차르뜨코프는 사라지고 예술가 차르뜨코프 내면에 숨어있던 욕망이 화한 수전노 차르뜨코프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 욕망이 가득 찼다고, 욕망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판단된 순간, 차르뜨코프는 수전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또한 ‘분신’으로 변한 ‘주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던 수전노 차르뜨코프는 자신이 꿈꿔왔던 실체를 뒤늦게 마주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잃어버린 주체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야 물론 이 화가의 재능은 분명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요. 뭔가 있긴 하지요. 뭔가를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물론 거기에 덧붙여 어떤 화가에게나 적용되는 찬사도 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말이 입술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꼴사납게 눈물이 쏟아져 울음을 터뜨리고 미친 사람처럼 홀에서 뛰쳐나와 버렸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중에서


자신의 옛 친구가 그린 그림에서 그는 이미 잃어버린 주체, 예술가 차르뜨코프가 꿈꿔 오던 예술적 열망을 실체로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예술적 재능은 사라지고 더 이상 어떤 감동도 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는 끝없는 좌절, 절망에 이르러 차르뜨코프는 파멸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들은 모두 다르지만 똑같은 과정을 겪는 차르뜨코프의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이후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인간의 욕망을 이길 힘을 종교적 신념에서 발견하는 작가의 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설득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적 구조상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종교나    


 6. 유령들의 거리-「네프스키 거리」


 다시 우리는 뻬쩨르베르그로 돌아가보지요. 성경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같은 공간이라고 여겨도 될 듯한 19세기경의 도시.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거리, 네프스키 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작가는 소설을 써냈습니다.

 ‘네프스키 거리’를 묘사하는데 몇 페이지를 소비할 정도로 이 거리가 무척이나 화려했던 모양입니다. 이야깃거리는 많지만 중요한 것만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여기서 등장하는 두 인물, 화가인 삐스까료프와 삐로고프라는 중위는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반영하는 ‘분신’이라고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순수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삐스까료프와 욕망의 화신 삐로고프는 서로 다른 듯 하지만 닮아있습니다. 그것은 여성을 사랑하지 않고 욕망한다는 점에서 둘은 판에 박힌 듯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둘의 끝은 서로 다릅니다. 삐스까료프는 죽고, 삐로고프는 망신을 당하지만 이내 쾌활하게 살아갑니다.

 잠시 평론가 김홍중 씨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디오니소스적인 감정의 주체는 전형적인 도취의 인간으로서 소위 ‘개별화의 원리’를 초월하여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완벽하게 동일화된 인간이다. 축제, 혁명, 약물에 의한 중독의 경우에 관찰되는 이러한 주체성과 조응하는 세계는 ‘근원적 일체’ 즉 원초적 자연 상태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폴론적 감정의 주체는 전형적인 몽상의 인간으로서 이에 조응하는 세계는 이러한 개체의 인식에 포섭되어 나타나는 현상적 세계이다.

-김홍중,「멜랑콜리와 모더니티」,『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228쪽.     


 김홍중 씨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삐스까료프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이고, 삐로고프는 ‘아폴론적 인간’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파악한 순간, 삐스까료프는 죽음을 선택했고, 삐로고프는 자기기만을 선택했습니다. 이 둘 모두 죽은 것입니다. 자기기만을 선택한 삐로고프는 언젠가 자신의 욕망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고, 삐스까료프는 자기 힘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네프스키 거리에는 이런 삐스까료프와 삐로고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령처럼 산 존재들도, 죽은 존재들도 모두 네프스키 거리에 묶여 부유하고 있습니다.


 7. 마치며 

  결국 ‘분신’을 통해 우리는 삶의 한 단면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 삶의 진실을 맞닿는 순간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삶이냐 죽음이냐, 자기기만이냐 자기반성이냐로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갑자기 햄릿의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고민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삼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극심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진실을 밝혀내는 것을 선택한 햄릿은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삶의 진실은 이렇듯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보듬고 나아갈 때 인간에게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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