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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Mar 23. 2021

USS INDIANAPOLIS(CA-35)

역사에 남은 선박들

군(軍)이라는 존재를 국가에 필적하는 존재로 여기거나 심지어 동일하거나 상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늘 존재해왔다. 과거일수록, 문명이 덜 발달할수록 이런 현상은 두드러졌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당연히 국가를 수호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군이 국가보다 상위 개념일 수는 없으며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 자체도 전근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 여전히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에게 총질해대는 그런 나라들도 있긴 하지만...


하지만 ‘조직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식의 발상은 늘 존재해왔고 특히 군이라는 조직 안에서 그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고, 군이라는 조직과 국가에 충성을 다했던 이들을 조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락으로 떨어뜨린 예를 꼭 군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다룰 이야기는 모두가 전쟁에 이겼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아무 죄없이 조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불명예를 뒤집어썼고 끝내 그 명예를 살아서 찾지 못했던 한 배와 그 배의 함장에 관한 이야기다.


USS INDIANAPOLIS(CA-35)

USS INDIANAPOLIS(CA-35)

1932년 취역 후, 미합중국 대통령을 수행하는 역할까지 맡았던 배수량 1만 톤의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는 주로 의전을 담당하고 VIP나 함대사령관의 기함으로 사용되는 등 ‘얼굴마담’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그런 시기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태평양함대의 본진인 진주만이 일본 해군의 기습에 7척의 군함이 항만 내에서 격침당하고 11척이 대파되며 미 해군은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캘리포니아에 주둔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인디애나폴리스는 당연히 전력에 공백이 생긴 태평양함대로 전진배치되어 항공모함 CV-2 렉싱턴의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30년대 초 건조되어 별다른 개조가 없었던 탓에 노후화했던 무장에 대한 개장이 요구되었고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대대적인 개장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혼자 싸우고 있던 호주를 지원하는 호송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았다. 임무를 마친 뒤 다시 렉싱턴의 호위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산호해 해전에서 렉싱턴이 격침되며 부재중 기함을 잃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1942. 5. 8 - 항공모함 USS Lexington의 최후

이후 북태평양으로 배치되어 간간히 포격 임무에 종사했지만 미 해군의 주력들이 대거 투입되어 치열한 격전을 펼친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해전에서도 본의 아니게 빠지게 된다. 이쯤만 보면 전화(戰禍)가 스스로 알아서 피해 가는 행운의 배로 봐도 무방할 듯. 

인디애나폴리스 함장 Charles B. McVay III 대령

1943년 8월에 태평양 중부 함대의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으로부터 함대 총기함으로 지명받으며 전선에 복귀하게 되는데 이듬해 사이판 전투, 필리핀 해전, 제2차 괌 전투에 참전하였다. 기함이었지만, 사이판과 필리핀 해에서는 지상지원이 아닌 적 항공전력에 대한 대공 전투에 주력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 3월 24일, 해병의 오키나와 상륙 지원 포격 임무 중 카미카제 공격을 가해 온 일본 항공기에게 일격을 당해 선저가 파손되고 동력계통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장병들의 손으로 적당한 수리를 해가며 샌프란시스코까지 단독으로 향하는 감투정신도 보여주었다.

The Little Boy -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이었다

애초 고속 순양함으로 개발되었지만 함대사령관 기함의 역할을 계속 맡아온 인디애나폴리스는 단독으로 극비 임무를 명받게 된다. 맨해튼 계획을 통해 개발된 원자폭탄 2발 중 우라늄-포신형 폭탄인 'The Little Boy'의 우라늄 내장재를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남태평양 티니안 섬까지 호위 없이 전속력으로 순항하여 전달하는 임무였다. 극비 임무의 특성상 당연히 중순양함으로써 호위 구축함을 거느려야 하는 상황은 생략되었고 - 대형 전투함이 전시에 단독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함장이 최소한의 호위함대를 배정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묵살당했고, 이 결정은 끝내 비극을 부르고 만다 - 최고속도와 최단거리로 티니안까지 달려갈 것, 화물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말 것, 유사시에도 화물을 먼저 구할 것을 주문받았고 빨리 도착할수록 전쟁도 일찍 끝낼 수 있다는 충고까지 받은 인디애나폴리스와 그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는 그 주문에 100% 충실히 따른다. 1945년 7월 16일, 승조원 1,196명과 비밀 화물을 실은 인디애나폴리스는 샌프란치스코를 출항하여 7월 19일 중간 기착지인 진주만에 들러, 8일 후인 7월 26일 티니안섬에 무사히 화물을 내려주게 된다.

북 마리아나 제도에서 레이테로 향하는 인디애나폴리스의 마지막 항로가 표기된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임무 - 죽음을 향한 단독항해(1945. 7.28~7.30)


이틀의 정박을 마친 인디애나폴리스에 내려진 명령은 필리핀의 레이테섬으로 향하라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밀 임무를 마친 중순양함에게 또다시 단독항해의 명령이 떨어진다. 처음부터 단독항해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기밀이 해제된 마당에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냐는 함장의 항의는 간단히 무시되었고 결국 인디애나폴리스는 티니안을 떠나 필리핀 레이테섬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7월 30일, 인디애나폴리스를 잠망경으로 포착한 잠수함이 조용히 95식 어뢰 6발을 발사한다. 0시 14분, 일본 잠수함 I(伊)-56호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발사된 어뢰 중 두 발이 정확히 선체 가운데를 직격 했고 불과 10분만에 침몰 당하게 된다. 

당시, 함장과 지휘부의 빠른 퇴선명령으로 인해 어뢰 피탄 시 사망했던 300여 명을 제외한 900여 명의 승조원이 퇴선에 성공했고, 구명환이나 구명뗏목에 올라탈 수 있었다. 하지만....


피격 직후부터 침몰 시까지 구조신호를 송신했지만 그들은 바다 위에 닷새가 넘는 시간 동안 방치된다. 


당시, 태평양에서 일본 해군 전력은 거의 일소되었다는 것이 미 해군 수뇌부의 판단이었고 이런 경향은 해군 전체에도 퍼져있었는데 -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지만 - 그런 상황에서 아군의 중순양함이 일본의 손에 격침당한다는 일을 상상하지 않았던 것. 게다가 멀쩡히 항해 중이었다면 바로 이어졌을 NOON REPORT(정오보고)가 오지 않고 있는데도 그 상황을 이상 상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한 마디로 해군의 기억에서 인디애나폴리스는 아예 지워져 있던 것이다. 

PV-1 Ventura 

침몰 4일 후인 8월 2일, 정기적인 항공정찰 중이던 정찰기 PV-1 Ventura의 기장 윌버 그윈 대위와 부기장 워렌 콜웰 대위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목격된다. 수면에 기나긴 기름띠와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표류 중인 장면이었던 것. 저공비행으로 상황을 확인한 그들은 아군의 장병들이 표류 중이고 많은 이들이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급히 가지고 있던 구명뗏목(Liferaft)과 무선 송신기를 떨어뜨리고 해당 해역에 구조가 필요한 장병들이 있다는 긴급신호를 보내게 된다.


구조신호를 받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이는 다목적 비행정이었던 PBY-5A Catalina였고 기장이었던 로버트 A. 마크 소령은 다급한 상황에 비행정을 대양에 착수시켰다. 급히 비행정 내부에 보관되어 있던 구명장비를 모조리 꺼내 던졌고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기체 내부와 날개, 심지어는 기체의 상부에까지 표류 중이던 선원들을 옮겨 태우며 고군분투한다. 순식간에 56명의 선원들을 비행정에 올렸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선원들이 표류 중이었고 상어의 공격과 탈진으로 인해 죽어가는 모습도 목도하게 된다. 선원들과 함께 표류 중이었던 멕베이 함장은 자신은 남아 표류를 계속하며 다른 선원들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고 비행정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더 많은 선원들을 기체에 올려놓기 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승무원들의 노력에도 끝내 모두를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몇몇의 선원을 더 잃은 후에야 구조선인 호위구축함 USS Cecil J.Doyle(DE-368)이 도착하며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된다.

PBY-5A Catalina 비행정. 대전 내내 정찰과 수색 구조용으로 활약한 다목적 항공기였다

최초 퇴선과 동시에 탈출에 성공한 승조원은 900여 명이었지만 최종적으로 구조된 이들은 316명뿐이었다. 거의 600명에 가까운 선원들이 닷새 동안의 표류 중에 탈진이나 상어의 공격으로 죽어갔던 것. 생존자들 역시 구조 이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야 했고 - 그들의 악몽을 모티브로 나중에 소설로 쓰인 것이 피터 벤츨리의 죠스(JAWS)였으며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화로 영화화된다 - 평생을 눈앞에서 죽어가는 전우들을 본 기억에 괴로워하게 된다.

함정 중 가장 먼저 구조현장에 도착했던 호위구축함 USS Cecil J.Doyle(DE-368)

미 해군의 비열한 꼬리 자르기


멕베이 대령은 구조 후 해군본부에 정식으로 구조신호를 왜 무시했느냐는 항의를 하게 되지만 해군본부 측에서는 구조신호를 받은 바 없다고 회신한다. 하지만, 후에 세 군데의 해군 수신국에서 인디애나폴리스의 구조신호를 수신했지만 한 군데에서는 일본의 기만 전략으로 보고 무시했고 나머지 두 군데에서는 술 마시고 노느라(!) 구조신호를 수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전쟁이 이미 끝난 마당에 전함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들이 없었다는 것. 단독항해라는 부당한 명령에도 따랐고 훈련한 대로 빠른 퇴선을 했으며 구조신호도 보냈지만 아예 그들의 존재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미 해군의 처사는 용서받기 어려운 직무유기였다. 


하지만, 전쟁이 다 끝난 마당에 1,196명의 승조원 중 316명만 구조되며 880명이 사망하고 실종된 초대형 사고에 대해 책임질 사람을 찾아야 했던 해군은 조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책임을 함장 멕베이 대령에게 뒤집어 씌우기로 작정한다.


1945년 11월, 해군은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B. 멕베이 3세를 기어이 군사법정으로 불러들인다. 이 법정 자체가 넌센스였던 것은 대전 내내 수많은 함정을 적의 공격으로 잃고 심지어는 적의 공격이 아닌 뻔히 예고되고 있던 태풍의 내습으로 함대 전체가 위험에 빠져 기어이 침몰한 선박도 나온 사건도 있었지만 그 지휘관을 법정에 세운 일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임무에 대한 위험을 강조하며 호위함대를 요청했던 지휘관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낯간지러운 모습은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결국 군사재판에서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해역에서는 회피기동을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와 '적의 공격해오는 중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해 평생을 군에 헌신해온 한 장교의 경력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 것. 

하지만, 이 낯간지러운 짓을 끝까지 감당하기 어려웠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유죄에 대한 사면을 발표하며 멕베이 함장을 복직시키는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미 책임소재는 해군에서 멕베이라는 개인에게 옮겨진 상황이었으니 땅에 떨어진 명예와 그들의 목숨을 책임지라며 아우성치는 여론을 그는 끝까지 외면하지 못했다. 1949년, 소장으로 예편 후 조용히 고향에서 살아가던 그는 1968년 11월 6일 코네티컷주의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을 떠나던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자신이 어린 시절 선원을 꿈꾸던 때 선물 받았던 선원모습의 장난감이었다고.


죠스를 좋아했던 어느 꼬마가 만들어낸 성과


1998년, 헌터 스콧이라는 11살 소년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National History Day라는 이벤트에 응모할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죠스가 인디애나폴리스 사고에서 모티브를 받아왔음을 알고 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이벤트에 응모할 생각이 없었던 소년은 당시까지 생존해있던 인디애나폴리스의 승조원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고 그들의 인터뷰 속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바로 함장인 멕베이 대령이 더러운 누명을 썼다는 것. 이미 응모할만한 이야기는 모조리 채웠지만 여기서 소년은 한 발을 더 내딛게 된다.

Hunter Scott. 이 꼬마의 활약으로 미 해군의 감추고 있던 역사가 드러났고 멕베이 대령의 누명이 벗겨진다

누명을 쓰고 불명예를 떠안은 멕베이 함장의 복권에 나서기 시작한 것. 마침 소년의 제안에 여론도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1999년, 미 상원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에 나서게 되었고 그때까지 기밀로 묶여있던 자료들이 해금되면서 인디애나폴리스가 명확한 구조신호를 했으나 수신국에서 무시했고 이 사실을 미 해군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기막힌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 인디애나폴리스에 어뢰 공격을 가한 잠수함 I(伊)-56호의 하시모토 모치츠라(橋本以行) 중좌의 편지가 멕베이 함장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결의안을 준비중이던 상원 군사 의원장 존 워너 상원의원에게 도착한다.


"저는 귀하의 결의안이 1945년 7월 30일 격침된 미 해군 중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대령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어뢰 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인으로서 저는 맥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디애나폴리스는 어떤 상태였더라도 격침이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인디애나폴리스의 승조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맥베이 대령에게 씌워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2000년,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멕베이 함장에 대한 사면복권 명령을 내렸고 아울러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였던 316명의 장병들에게 은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어, 2001년 미 해군장관 Gordon Richard England는 멕베이 함장에 대한 모든 징계기록을 삭제하며 최종적으로 그에게 씌워져있던 누명을 벗겨주며 명예를 찾아주게 된다. 


.... 멕베이 함장의 명예를 되찾아주었던 소년 헌터 스콧. 잽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2001년 8월 24일을 헌터 스콧의 날로 지정하고 그의 노력을 치하했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ROTC로 2007년 임관, USS Bonhomme Richard (LHD-6)에서 헬리콥터 조종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인디애나폴리스 생존자와 함께한 헌터 스콧 대위 

평생을 군에 몸담고 복무에 헌신했던 한 장교의 지난한 명예회복 과정을 보면서 사실 인디애나폴리스함만의 문제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일단 그 일을 책임지울 누군가를 찾아서 희생양을 찾는 것,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또 그 과정에 11살 소년의 의욕적인 활약이 궤도에서 이탈한 역사를 바로 잡는데 일조했다는 것에 새삼 미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되었다.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CA-35 Indianapolis Mem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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