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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Apr 12. 2021

The Player

No.7 위대한 인간, Max Schmeling

Maximillian Adolph Otto Siegfried "Max" Schmeling(1905. 9.28~2005. 2. 2)

운동선수들에게 실력만큼 인성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일만은 아니다. 사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완벽한 선수들은 드물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완벽해 보이는 선수들에게서 옥에 티를 찾는데 혈안이 되기도 한다. 그런 부분들은 언론의 가십난에 슬그머니 자리 잡아 풍선껌처럼 씹는 대상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며 심하면 아예 매장시켜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애초 완벽할 수 없는 것이고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런 행태는 어떤 면에서는 정의구현 정도로 치장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중에 노출된 이미지에 대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잔인함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돋보기로 한 가지, 한 가지를 모두 뜯어 발기는 행태에도 뭐 하나 잡히지 않는 완벽한 인간들이 가끔 있으니...


오늘 주인공인 Max Schmeling. 

인종주의의 극단을 달리던 조국에서 '최강의 아리안 종'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목숨을 걸고 지켜낸 '신념의 인간'으로 기념될 위대한 운동선수이자 위대한 인간으로 남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1905년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Klein Luckow에서 태어난 막스 슈멜링은 어린 시절부터 권투에서 독보적인 기량을 보였다. 1924년, 독일 아마추어 라이트 헤비급 정상에 올랐고, 프로로 전향하여 8승 중 6승을 KO로 거둔 하드펀쳐이기도 했다. 펀치력만큼이나 탁월한 기본기로 승승장구했고 프로로 전향하고 3년 만인 1927년에 유럽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독일 국내 챔피언과 유럽 챔피언을 순조롭게 방어하며 1930년,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 1932년까지 방어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Joe Louis Barrow(1914. 5.13~1981. 4.12). 12년간 타이틀을 지킨 당대 최강의 챔피언이었다

1932년, 세계타이틀은 잃었지만 여전히 독일과 유럽 무대에서는 상대가 없을 정도의 강호였는데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드날리는 계기가 생겼으니 1936년 6월 19일, 미국 양키즈 스타디움에서 벌어졌던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와의 첫 대결이 그것이었다. 


어느새 30대로 접어든 슈멜링과 22살짜리 혈기왕성한 신성과의 승부, 모두 슈멜링의 열세를 점쳐졌으나, 초반부터 압도하며 패배를 모르던 조 루이스에게 12회 KO승을 거두게 된 것. 당시, 나치가 득세했던 독일에서 이 승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최고의 떡밥이었으며 당시 독일의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개선하는 슈멜링을 자신의 차까지 보내서 모셔오는 파격적인 대우를 보여주게 된다. 당연히 독일에서 그의 인기도 다시 정점으로 튀어올랐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떠오르는 강호를 눕힌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다.

James J. Braddock. 영화 신데렐라맨의 주인공이었던 챔피언. 32살에 조 루이스에게 타이틀을 넘겨준다

한편, 퇴물로 취급받던 슈멜링에게 불의의 패배를 당한 조 루이스에게 이 대전은 치욕 그 자체였으며 이듬해인 1937년, 제임스 J. 브래독 - 러셀 크로우가 주연으로 등장했던 영화 '신데렐라맨'의 주인공. 맥스 베어를 꺾고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입지전적인 인물 - 을 꺾고 세계타이틀을 거머쥐었으나 "슈멜링에게 승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타이틀도 의미 없다."라는 말로 리턴 매치를 고대하게 된다. 그만큼 1차전에서의 패배가 큰 상처였던 것. 그리하여 이듬해인 1938년, 다시 슈멜링과의 리턴 매치가 벌어지게 된다.

1938년 6월, 조 루이스와의 2차전 개체량 때의 Max Schmeling

복수를 꿈꾸는 조 루이스의 바람처럼 당시 유럽을 위협하는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던 나치 독일에 대한 미국의 견제심도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드날리고 싶던 히틀러의 독일과 마찬가지였는데 이로인해 이미 둘만의 대결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의 대결로 경기는 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변질되었다. 


1938년 6월 22일, 뉴욕의 양키즈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처럼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두려울 것 없어진 젊은 챔프의 주먹은 사정없이 늙은 슈멜링을 괴롭혔고 1라운드 2분이 넘자마자 슈멜링은 링 위에 길게 눕고 말았다. 조 루이스의 KO승. 히틀러에게는 1936년, 하계올림픽에서 독일의 육상선수 루츠 롱이 제시 오웬스에게 패배한데 이은 치욕적인 패배로 여겨졌겠지만 이미 30대를 넘어 전성기를 지난 슈멜링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슈멜링의 또 다른 싸움은 이듬해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시작된다.

36살에 입대하여 팔쉬름예거의 일원으로 활동할 당시의 Max Schmeling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이미 침공 이전부터 유태인들에 대한 핍박은 이미 시작되었고 전쟁 발발과 함께 그들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공교롭게도 슈멜링은 이웃들 대부분이 유태인들이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트레이너도 유태인이었던 상황이었는데, 그들에 대한 불이익과 해고하라는 압박에도 그는 묵묵히 그들을 지켜주었고 일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었을 때, 몰래 피난시키는 것으로 당국의 지시에 저항했다. 심지어는 수용소로 끌려간 자신의 트레이너를 자신의 이름값으로 빼내어 따로 다른 나라로 보내기까지 했던 것. 

공수부대로 참전했던 막스 슈멜링

거기에 '강한 독일 민족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를 슈츠슈타펠(Schutzstaffel : SS친위대)로 입대시키고 싶었던 윗선의 바람과 달리 그는 나치당 가입도 거부하고 있었고 결국 서른여섯의 나이에 독일 공군으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말이 자원입대였지 실은 미운털이 박힌 영웅을 사지로 모는 처사였던 것. 그가 입대한 부대는 당시 독일 공군 소속으로 창설된 정예부대였던 팔쉬름예거(Fallschirmjäger)였으며 이곳에서도 수많은 보도사진을 찍히며 선무공작에 동원된다. 독일 공군 제7강하엽병사단 소속으로 배치된 그는 훗날 독일 공수부대의 무덤으로 불렸던 1941년 5월 20일, 크레타섬에 투입되었지만 강하 직후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며 일찌감치 전쟁에서 벗어나게 된다. 


연합국 병력들은 포로가 된 그를 여전히 세계챔피언으로 대접해주었고 사인까지 받아갈 정도였다고 하니 어쩌면 그의 전쟁이 일찌감치 끝난 것이 개인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듯. 크레타섬 전투가 독일의 상처뿐인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그도 포로생활을 마무리하고 독일로 복귀하게 되지만 부상의 영향으로 전역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컴백했지만 43살이 된 1948년 링을 떠나 은퇴하게 된다. 권투에서만큼 그는 은퇴 이후에도 특출난 사업수완을 보이며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코카콜라의 독일 판권을 사들여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된 것. 이처럼 세계챔피언에 이어 사업가로서도 정점에 오르게 된다.

전후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막스 슈멜링

한편, 그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챔피언 조 루이스의 삶은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었는데 타이틀을 잃고 알코올 중독과 마약중독으로 이미 잊힌 존재로 변해가고 있던 것. 돈이 없어서 은퇴를 번복하고 링위에 올랐다가 떠오르고 있던 챔프 록키 마르시아노에게 비참한 패배까지 당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벨보이로 근근이 연명하는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 그에게 세계적 패배를 당했던 막스 슈멜링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그의 자립을 돕는 등 조 루이스의 뒤를 봐주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인다. 1981년 조 루이스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러주기까지 했던 그. 


이후로도 막스 슈멜링 재단을 세워 불우한 이들에게도 눈을 돌렸고 독일 스포츠 기자들이 뽑은 가장 위대했던 독일 스포츠 선수로 선정되고 국제 권투선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기도 하는 등 영광의 말년을 보낸 그는 2005년,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막스 슈멜링

운동선수로써도 정점에 올랐지만 불의에 굴하지 않았고 자신의 신념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사업에서도 대성공을 했던 그.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엄친아였던 그는 2003년, 콘라드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빌리 브란트, 요한 세바스찬 바흐 등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에 이름을 올리며 그 정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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