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봄날,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만춘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과 만났다. 마치 나와 취향이 딱 맞는 사람과 마주친 것 같은 기분. 나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요즘 내가 매일 하는 작업은 19세기 말에 발행된 신문과 잡지에 실린 살롱전의 비평을 읽는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아를레트 파르주(1941-)라는 프랑스 역사학자가, 아카이브가 있는 도서관에서 자신의 전공인 18세기의 사료들을 읽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역사로 엮어내는지 써 내려간 에세이다. 이러니 내가 제주도의 어느 책방에서 이 책과 마주쳤을 때(더 정확히 말하면, 내 동생이 이 책을 보고 내게 추천해 주었을 때), 어떻게 이리도 '우연히' 이 책을 여기서 보게 되었을까 하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들었는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두근거림이었다. 사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목적 없는 책 읽기였다. 첫 장을 펼 때부터 전율이 왔다. 파르주는 18세기의 형사사건 아카이브를 주요 사료로 삼고 있었다. 그는 당대의 "고발장, 재판 기록, 심문 기록, 수사 기록, 판결문"(9쪽) 등을 직접 하나하나 읽고 필사했다고 했다. 1980년대에는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고, 노트북이나 휴대용 디지털카메라도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아카이브에서 자신이 본 자료들을 모두 다른 종이에 베껴 쓰는 일이 당연했을 것이다. 2022년을 사는 나는 고화질로 스캔이 된 옛날 신문과 잡지들을 그것도 제주도의 내 방에서 볼 수 있고, 심지어 아주 크게 확대해서 볼 수도 있다.
파르주가 다루었던 기록물들이 특이했던 점은 그것들이 누군가의 말을 글로 적어놓은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심문 기록은 경찰이 범죄자를 심문하던 내용을 옆에서 서기가 듣고 그대로 적은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르주는 그러한 사료들이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심지어는 일기와 같은, 처음부터 글이 될 목적으로 쓰인 사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들임을 지적했다. 정말 그럴 것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인쇄물들은 물론 당대의 텍스트라 할지라도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일 것이다. 그러니 심문을 하고, 조사를 받았던 이들의 말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고, 또 한편으론 덜 솔직한 글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더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실을 수 있었던 이들과 잡다한 범죄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던 이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계층에 속한 이들일 수밖에 없었다. 즉, 파르주가 보았던 사료들은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 사용했던 용어나 어투, 이야깃거리, 관심사, 더 나아가 그들의 일상다반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삶의 흔적"(13쪽)이었다는 말이 된다. (참고로 파르주는 <사생활의 역사>라는 두꺼운 역사서의 공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몇 년 전에 읽었던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도 떠올랐다.)
날 것 그대로의 아카이브 사료가 역사로 변환되는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다. 성공을 꿈꾸며 파리로 이주해 온 바늘 장수가 3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다 시력을 잃고 다른 직업을 찾게 된 실제 사연. 이 바늘 장수의 진술은 당대의 파리가 이주민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안겨주는 불행한 도시였다는 역사적 가설의 근거가 된다. 나는 살롱전 비평들을 읽으며 당대 미술사의 어떤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무수한 생각들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러한 경험 역시 너무 오랜만이었다.
아카이브 사료들을 읽다가 우연히 유명인사를 발견했던 에피소드도 재밌었다. 파르주는 고발 사건 문서들 속에서 우연히 사디즘을 창시한 사드 후작을 발견하기도 했다. 문서에 적힌 서명이 실제 사드 후작이 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신기하고 짜릿했을까. 며칠 전에 『르 피가로』지를 읽다가 우연히 에밀 졸라의 살롱전 비평을 발견하고 반가웠던 기억이 새록 떠올랐다. 막막할 정도로 거대한 양의 아카이브 속에서 이런 낭만조차 없다면 이 작업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단했을까.
파르주는 아카이브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지양해야 할 점들도 알려준다.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너무 매료되어 질문하는 습관을 버리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나, 자신이 세운 가설들에 딱 들어맞는 사료들만 수집하는 경향(파르주는 이를 '동일화'라고 명명했다.)을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사료가 있다면, 반드시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사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아카이브들을 빽빽히 채우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료들은 그렇게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밤하늘의 우주처럼 무한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카이브는 어떤 모양으로 세워질지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역사의 공사 현장이다."(139쪽)라는 문장이 스친다. 파르주는 아카이브라는 터 위에서 '18세기 파리의 식품 절도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나의 역사는 얼마쯤 지어졌을까. 1층? 2층? 아니면 지하? 나의 건축물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게 될지, 그 장소에 누가 찾아와 감상해 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문득 공사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만난 이 책이 내게는 정말 필요했던 시원한 바람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