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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Jan 15. 2023

바다 같은 소설

김금희  『복자에게』 문학동네 (2020)

이 책을 선물로 주었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넌 제주도 여자니까 괜찮을 거야." 우리는 그때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친구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며칠 뒤에 친구는 이 책을 제주로 보내주었다. 몇 권의 다른 책들과 함께.


김금희 작가의 소설  『복자에게』는 해변 모래밭을 걸을 때 파도가 밀려와 발을 적시듯,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때마다 추억이 계속 밀려오는 듯한 책이다. '복자'라는 이름조차 내게는 친근한 이름이다. 엄마의 오랜 친구 중에 복자 이모가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걸걸한 음악 선생님. 이모는 우리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새벽까지 남아 설거지를 도왔다. 그걸 보며, 나에게도 저런 친구가 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이 60이 넘어 치르는 친구 부모의 장례식에 밤을 새우며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이라니. 그건 우정도, 의리도 아닌 어떤 경이로운 경지의 관계 같았다. 소설 속 복자를 보며 새삼스레 복자 이모가 떠올랐다. 이모는 이제 음악 선생님 일을 그만두고 국숫집을 열였다. 간호사일을 그만두고 고고리섬에서 작은 가게를 연 복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부침을 견디는 강인함 같은 것이 그 두 사람을 교차시켰다. 순수한 첫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오세나 서울 친구 홍유도 모두 내 곁에 있는 이들이었다.


 "나는 한 계절 몇 달 만에 그렇게 멀어져 버린 그곳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가 따귀를 갈기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이를 꽉 물고 그런 마음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복자처럼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꼿꼿이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86쪽)  


이 문장을 읽을 즈음 다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내게도 복자처럼 힘든 날들을 버틸 수 있는 지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니 나 역시 바람에 대해서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따귀를 갈기듯" 휘몰아치는 바람.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과 같은 바람. 땅을 딛고 선 두 발과 다리에 힘을 주어야만 헤쳐갈 수 있는 그런 바람. 그래도 나는 그런 제주 바람이 좋았다. 언제부턴가 그 바람이 오히려 나를, 내 몸을, 내 순간들을 지탱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이 불어닥칠 때에야 나는 내 안의 어떤 힘과 의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마 복자도 그런 마음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 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에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문장이다. 하루 종일 전공 공부를 하다 잠들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 나에게는 해녀들이 내쉬는 숨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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