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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Sep 21. 2024

파리 너머의 세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이세욱 옮김 문학동네 2007

어릴 적에 『탈무드』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유대인들의 스승 랍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1924-2016)의 소설을 읽으며, 문득 그 시절의 랍비들이 떠올랐다. 오랜 경험과 학식으로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랍비들과 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순수한 믿음. 이 소설에도 그런 것들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 파리

'이드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열다섯 살의 아프리카 소년은 사라하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인 '타벨발라'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외지인들에 의해 사진이 찍히고, 자신의 사진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타벨발라를 떠나 파리로의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드리스는 자신이 살던 타벨발라에서 베니 아베스, 베샤르, 오랑을 거쳐 프랑스 본토에 이르고, 마르세유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한다.


그런데 투르니에가 묘사하는 대도시 파리는 허울뿐인 것들이 지배하는 허황된 곳이다. 포스터의 광고들과 화려한 진열창의 상품들은 순수한 아프리카 소년의 눈을 현혹시키고,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드리스는 자신이 살아온 사하라 사막도 관광포스터를 통해 보게 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들지. 하지만 나는 그 설명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어느 날 금발머리의 프랑스 여자 한 사람이 우리 오아시스 근처로 지나갔어. 여자는 내 사진을 찍었지. 그러고는 ‘사진을 보내줄게’하고 말했지. 나는 끝내 아무 것도 받지 못했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파리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 와보니까 어디에 가나 사진이 보여. 아프리카의 사진들도 있어. 사막과 오아시스를 찍은 사진들 말이야.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알아보지를 못하겠어. 사람들은 내게 말하지. ‘이게 네 나라야. 이게 너야’하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내 나라나 나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216쪽)

 

사하라 사막의 관광포스터처럼 복제된 모든 것들은 파리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 그것들 중에 진짜를 찾기란 이드리스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드리스는 험난한 파리에서의 생활 끝에 『탈무드』의 랍비를 닮은 이슬람 서예의 대가를 만나 가짜들 속에서 진짜를 선별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진짜 타벨발라

대도시 파리와는 달리 타벨발라에는 자동차도, 영화관도, 쇼핑몰도 없다. 가난한 타벨발라는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고, 불편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타벨발라에는 풍부한 지혜의 말들과 그것들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득하다. 투르니에가 소설의 초반에 그리는 타벨발라는 그러한 믿음들이 모여 어떠한 섭리가 작동하는 이상적인 장소처럼 느껴진다. 이드리스의 사막 친구였던 이브라힘은 사하라 사막에 신성한 힘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다.


아무튼 태양과 고독 때문에 조금 미쳐버린 이 소년은 신도 악마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사막의 메마름까지도 이용할 줄 알았다.(중략) 그의 불경한 행동은 이드리스를 공포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물을 마실 때는 적어도 한쪽 무릎은 땅바닥에 댄 채로 두 손으로 그릇을 꼭 잡고 마셔야 하건만, 그는 사발을 한 손으로 들고 선 채로 마시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오아시스 사람들은 불에 관해서 말할 때 '타닥거리는 늙은이'나 '재를 만들어내는 이'하는 식으로 에둘러서 말하는데, 그는 그냥 '불'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건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비는 거나 다름없는 경솔한 말버릇이다.(12-13쪽)


이브라힘은 결국 지옥 같은 땅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악동 이브라힘과는 반대로 이드리스의 어머니는 비록 “나쁜 쪽으로 상상하는 게 버릇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지혜의 말들을 따르는 것이 몸에 밴 여인이다.(30쪽) 아들 이드리스가 타벨발라를 떠나 파리로 향하기 직전에도 그녀는 그 믿음을 몸소 실행한다.


그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한쪽 맨발을 집의 문턱에 올려놓고 물로 씻었다. "이래야 네 발이 이 문턱을 잊지 않고 너를 여기로 데려올거야"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집을 나섰다.(93쪽)


내가 『탈무드』를 읽었던 그 시절에는 온갖 잡다한 미신들로 점철된 어른들의 말이 내 주변 곳곳을 채우던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도 어려움을 겪을 때면 내가 어김없이 찾게 되는 것도 ‘엄마 손은 약손’ 같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주문이었다. 그것들이 이미 나의 “마음에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10쪽) 어느새 파리의 이민노동자가 된 이드리스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타벨발라를 그리워한다.


거대하고 투미한 이 낙타와 함께 걸으면서 이드리스는 이상하게도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타벨발라의 암석사막과 베니 아베스의 모래언덕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동차들을 에돌아가기도 하고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서기도 하고 이따금 지하도로 들어서기도 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제트 조베이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259쪽)


우리의 이드리스는 과연 무사히 타벨발라로 돌아갔을까.



방돔 광장

『황금 구슬』이 모험을 다룬 소설이기에, 나는 그 결말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방돔 광장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가장 파리다운 곳을 묻는다면, 방돔 광장이 손에 꼽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 호화로운 곳에서 이민노동자들의 상징인 공기해머를 들고 서있는 이드리스를 상상하면, 그가 낙타와 함께 파리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렀던 장면만큼이나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이제 방돔 광장을 떠올릴 때면, 나는 ‘가짜 파리!’라고 속으로 외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적어도 ‘진짜 파리는 그곳에 있지 않아!’라고 말할 것 같다. 우리 각자의 황금 구슬을 찾아떠나는 모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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