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로 이끌어 준 까미노 운명
지난 2012년 여름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하 까미노)을 걷는 내내 어디선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초 신앙심을 가지고 걸음을 시작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니 신의 기운이 나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까미노에서 만난 인연과 운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아마 어설픈 불교신자로만 살면서 미련하게 나만을 붙잡고 살았을지 모른다.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순간을 떠올려 본다.
새벽 걸음 중 있던 일이다. 세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성해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양갈래로 앉아 기도하는 그들 사이로 먼지처럼 숨죽여 걸어갔다. 감히 카메라를 들 생각조차 없었다. 지난밤 나와 같은 방을 쓴 남자들 이야기다.
비야르 데 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서 우리는 같은 방을 썼다. 이층 침대가 두 개 놓인 방, 그러니깐 남자 셋에 여자 하나다. 여느 때처럼 무리에서 꼴찌로 도착해 동행들과 다른 방을 배정받은 결과, 남자들과 동침이다.
*알베르게(Al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 사설·공립, 기부제, 수도회 알베르게 등 종류가 다양하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동양인 여자 한 명이랑 좁은 방에 있으니 어쩔 줄 몰랐던 삼총사 표정이 마냥 귀여웠다. 키가 큰 녀석들이 워낙 순둥순둥해서 동행들에게 달려가선 내 멋대로 '폴란드 어린이들'이라고 불러댔다. 신학대학에 재학 중인 예비 신부님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다. 내가 본 인상적인 장면은 미래 사제들이 올리는 기도였다. 그들은 까미노에서도 하루에 5번씩 신성한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정작 같은 방에 묵었던 날, 서로 이야기를 나누질 못했다. 국적 정도만 간단하게 인사한 뒤 나는 무리들과 저녁 먹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고 녀석들은 알베르게에 딸린 바(bar)에도 한번 나타나질 않고 좁은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결국 내일 언제 출발하는지 정도만 서로 교환한 채 잠들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출발할 계획이라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불을 켜도 좋다고 합의하고 잠들었지만 이들은 깼음에도 잠들어 있는 나를 위해 불을 켜지 않았다. 내가 새벽 3시까지 잠도 못 자고 뒤척이던 걸 알고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말없이 움직였다. 불빛 하나 안 들어오는 깜깜한 방이었는데 그 배려가 정말 예수님 수준이었다. 곧이어 깬 나는 불을 켰다. 우리 넷 모두 준비가 더 쉬워졌다. 새벽 4시, 그렇게 우리 넷은 눈 뜨자마자 번개처럼 준비를 완료했다. 난 다른 방에 있는 동행들을 깨우고 요기를 챙긴 뒤 폴란드 친구들보단 20분 늦게 출발했다. 그렇게 뒤따라 나선 길에서 폴란드 신학도들의 신성한 기도를 듣게 된 것이다.
삼총사들을 만난 이후 어느 순간 묘한 기분을 감지했다. 이상하게 멀리서 누군가 날 반기는 기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한국으로 돌아와, 그것도 몇 달 뒤 스스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던 날 드러났다. 그래서 세례성사 때 눈물을 쏟고 쏟았다. 사제서품식 때 눈물을 흘리던 신부님들처럼. 까미노가 어쩌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운명의 수레바퀴였던 셈이었을까. 그날 내가 마사리페까지 빨리 도착해서 동행들과 같은 방을 썼다면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됐을까. 폴란드 삼총사 친구들과 한 방을 쓰는 인연이 없었다면 결정적인 신앙의 기운을 받지 못할 거라 확신한다.
마사리페에서 만난 이후로는 일정이 비슷해 며칠 동안 같은 숙소에 머물렀는데 첫날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다시 만날 때마다 반가워했고 잠깐이라도 이어가지 못한 말들을 이어갔다. 마주칠 때마다 "까미노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았느냐"를 질문을 서로 해댔는데 고작 며칠 이후론 우린 만날 수가 없어 각자의 답을 듣지 못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마지막 날, 귀하게 대화 시간을 만들었지만 마침 취침 소등 시간에 걸렸다. 우리는 너무 안타까워했다. 그 와중에 메튜가 급하게 내 메일 주소를 적어 갔는데 아직까진 메일이 없다.
언젠가 셋 중 하나는 꼭 내게 연락을 해줬으면 좋겠다.
당신들 덕분에 에밀리아라는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들의 깨달음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라도 듣고 싶다. 자기 안의 사제성소를 찾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비웠는지, 하느님의 부르심을 응답할 준비가 됐는지 등등 묻고 싶다. 신학교 4학년생이던 사이공은 벌써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님이 됐겠구나. 언젠가 폴란드의 한 성당에서 만날 날을 진심으로 기다린다.
폴란드 친구들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끌림을 받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까미노 3일째(2012년 7월 14일) 이야기를 하고 싶다.
11:30 am. 살발디카(Zabaldika) 마을에 도착했다. 좁다란 숲 속을 빠져 산 꼭대기에 오르니 자매 공동체에서 관리하는 작은 성당(Iglesia Sagrado Crazon)이 나왔다. 성당을 들어가는 순간 마음이 이상하다. 공동체 멤버 한 분이 화살표로 된 포스트잇을 건네주는데도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이 닥쳐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스페인어로 'Sagrado Crazon'은 '성심'(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의 상징)을 말한다.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붙이고선 의자에 앉아 앞을 바라봤다. 법당에 들어가 가운데 계신 부처님 눈을 한참 바라보는 습관이 나온다. 근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정말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머 내가 왜 이러지?
엉엉 우는 기운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으니 나도 꽤 당황스럽다. 언제부터 기다린 울음인지 그 소리가 이 작은 성당을 점점 가득 채워 갔다. 유미와 써니, 같이 걷는 두 동행들에게 들려주기 민망할 만큼 서러운 눈물이었다. 그치려고 해도 이놈의 울음은 쏟아져 가라앉질 않았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가슴이 꽉 막혔고, 그러더니 가슴속 응어리들이 바위처럼 커다랗게 뭉쳐 있다가 치솟았던 거다. 눈물이라도 멈추려 두 손 주먹 쥐고 눈가를 세게 비볐다. 그래도 멈추질 않아 주먹에 더 힘주고 눈가를 누르며 비볐다.
큰 소리를 내서 울어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할아버지께서 운명(殞命)하시고 그를 염습(殮襲)했을 때 이후 처음. 한국은행에 출입할 때도 드문드문 울긴 했다. 나는 본관 1층 화장실 마지막 칸의 단골손님이었다. 같은 층 기자실에서 가장 빨리 달려가 나만의 공간 속에 감정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비밀 장소였다. 가끔은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안 새어 나갈 정도로 울기도 했다. 눈물 멈추는 데 주력했던 시기기 때문에 눈물의 의미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죽어라고 싫었고, 내가 울고 있는 자체는 더 싫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눈물을 멈춰야 코앞에 닥친 일을 1%라도 빨리 진행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은 뒤로한 채 감정을 엄청 억누르며 살았다. 언제부턴가 혼자 있어도 맘 놓고 울지 못할 만큼.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할 만큼 감정이 죽어 있었다.
작은 성당에서 왜 울었던 걸까?
불교신자로만 살았던 내가 예수님 앞에서 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과거를 굳이 돌이키며 사는 타입은 아니지만 너무 궁금한 나머지 과정을 애써 짚어 봤다. 성당에 도착하기 2시간 전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가스 같은 게 점점 온몸을 채우긴 했다. 머리도 심장 아래쪽을 강하게 짓눌렀다. 순간 울컥울컥 그래도 참았다. 이 성당에 오기 전까지는.
모두 다 아픈 구석은 있으니깐 그렇게 모두가 살아가니깐. 거기다 꿈도 있으니깐. 아프다고 슬픔 따위 남발하지 말자고 맘먹은 지가 오래다. 한편으로는, 한 없이 작은 나란 걸 인정하면서 스스로에게만큼은 힘들어하던 나. 상처투성이에 성격파탄자, 아직도 갈 길 먼 어린 나는 그래도 그저 웃으며 넘기며 살았다. 아직 남아 있는 길이 많다며. 이런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친구와 동기 들이 왜 날 보며 안 쓰러워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언제부터 눈물 흘리는 일을 잊어버렸는지, 혹시 눈물샘은 없어졌는지. 그러면 독기만 들었는지! 웃으며 넘긴 게 잘 한 건지 갑자기 의문이 든다.
정작 내 마음은 몰라주고 살았다.
아픔을 이겨낸 게 아니라 묻어두고만 살았던 것도 같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머무는 동안 순례자 미사에 매일 참여했다. 신부님 말씀을 분위기로만 파악하면서도 그 신성한 분위기가 나랑 맞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기 시작했다.
까미노를 모두 마친 이후에도, 이 글을 끄적이는 지금도 이날 왜 눈물이 쏟아졌는지, 왜 그토록 서럽게 울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날 온전히 받아주는 존재, 하느님이 계셨던 거다. 하느님과 인연을 맺을 운명이었던 거라 결론지어 본다.
까미노 첫날 피레네 산맥에서 있던 일이다. 햇살에 유난히 빛나는 성모 마리아상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 빛으로 표현한 것일까. 그녀에게 다가가야겠다는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 마리아상은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서 가져왔다고 한다.
*루르드: 14세 소녀가 성모 마리아의 환영을 수차례 목격했던(1858년) 마사비엘 동굴이 있는 곳. 1862년 교황은 이 기적을 공식적으로 인정,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숭배를 공인했다. 특히 마사비엘 동굴의 지하 샘물은 불치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일반 순례자뿐 아니라 환자나 불구자들이 매년 찾는 곳이기도 하다.
불교 집안에서 자라서 당연하게 부처님을 의존하고 살았다. 신앙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불안하거나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 땐 절부터 찾아가곤 했다. 회사 옆 조계사로 가서 저녁 예불을 참여하거나 서울 근교에 바람도 쐴 수 있는 절을 찾아가 단주를 하나씩 사서 모으곤 했다. 심지어 평창에 위치한 월정사 같은 조용한 절에 들어가 1주일을 보내며 엄청나게 기도를 하고 왔었다. 그랬던 나였다. 근데 까미노에선 자꾸 다른 존재가 날 따뜻하게 반겨주는 인상을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유미와 중반까지 함께 걸었던 진(별칭)도 모태신앙이었다. 순례자 미사에 함께 참석할 때나 지나가던 성당에 들리면 성수를 손가락에 찍고 십자 성호를 긋고 기도하던 모습이 부러웠다. 해외에 나와서도 나의 정신적 지주를 쉽게 접하고 기댈 곳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더구나 가톨릭 신자가 90%인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 신의 은총과 기운을 더 받아 신앙심이 강건해질 수 있다. 미사 중 "아멘(Amen)"이라는 말을 나도 눈치껏 하긴 했지만 친구들의 삶 속에 묻어 있는 간절함의 기도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까미노 초반 론세스바예스부터 만난 이탈리아인 루이지는 산티아고에서 내게 말했다. "난 온전히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까미노를 걸었어.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얻어 가는 기분이야. 난 지금 너무 행복해"
이젠 가톨릭 신자다. 까미노가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신앙을 내 인생에 넣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을 거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다. 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부름을 받고 스스로 성당을 찾아가 주님의 자녀가 됐다. 더 큰 하느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임신 중엔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 아래 견진성사도 받았다. 내 아기는 뱃속에서 더 큰 강복을 받아서 똘망똘망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까미노를 다시 찾을 땐 주님의 자녀의 역할을 하면서 걷고 싶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주님의 자녀로 관여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