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기억하고 나를 만들어가기
사람들과 둥글둥글 어울리며 신나 하지만 혼자인 나를 워낙 좋아한다. 낯선 식당에 들어가 뭐든 꼭꼭 씹어 잘 먹고 영화도 쇼핑도 나 홀로 즐긴다. 무인도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처럼 어색한 구석이 하나 없을 정도로 시간을 잘 보낸다.
아쉬울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여행지에선 가끔 외롭다. 특별한 기분을 사진으로 기억하고 싶은 장소가 있는데 혼자라서 포기한 적이 많다. 인적 드문 곳에선 셀카만이 답이다. 혼자가 더 좋으니깐 언제부턴가 아쉬움조차 갖지 않기로 했다. 나 홀로 여행에도 기회비용은 따르니깐.
그래,
가슴으로 기억하는 게 더 남는 거지
나를 담을 생각은 점점 하지 않게 됐다. 사회생활하면서 치인 일이 많아 그런지 여행 때라도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는 일이 먼저였다. 불쑥 치고 나온 속마음부터 챙겨줘야 했다. 여행지에서만큼은 그랬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면 사진 한 장 금방 찍겠지만 감정의 흐름을 깨는 건 예의가 아니다. 솔직한 나를 깨달으면 얼음이 되곤 하는데 그 상태로는 카메라를 들고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 대신 정신을 좀 차리고 나서는,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던 사물이나 풍경에 감정을 남겨 두는 버릇이 생겼다. 날 위로하는 나비나 어린양 같은 존재들에게 말이다.
<나보다 다른 세상 찍기에 바빴던 나다.>
사진에 담길 욕심을 버렸다기보단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내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곳곳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모르는 세상 속 모습은 어떤지 보는 걸로도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서 보면 죄다 풍경사진이라 한 번씩 놀랬다가도 셀카 몇 장만으로 만족해했다.
나를 안 찍어도 되는 이유를 굳이 들며 살다가 담고 싶은 장소가 고집스럽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진 속 나를 보니 행복해 보여서였다. 미친 휴가를 내고 스페인 땅으로 날아갔을 때부터였나 보다. 서른 살 앞두고 열정의 땅 스페인 곳곳을 다니며 나를 많이 담아 봤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나날을 위로하려 떠난 여행인데 9박 10일 내내 가슴 벅찬 여정을 보냈다. 첫 유럽이라 느낌이 달랐던 걸까. 낯선 이에게도 서슴지 않고 사진 한 장 부탁했다. DSLR로 셀카를 시도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먼저 손 내밀며 찍어주기도 했다. 신기할 일이 생겼다. 좋았다. 누군가 찍어 준 사진 속 나를 보니 용기가 났다.
나를 들여다볼 용기!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우리가 행복했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바람은 마음을 다독여주었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랜 시간 상기됐던 얼굴을 쓸어내렸다. 며칠 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다른 사람이 다름없었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선 소매치기 걱정에 며칠 내내 긴장감이 가득했다. 높은 곳에 다다를수록 마음도 가벼워졌다. 탁 트인 그라나다 시내를 바라보니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이었다. 간절히 보고 싶은 할아버지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던 할아버지. 이제는 할아버지를 보고 싶을 때 그라나다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
**카메라 소매치기를 당할 가능성이 높은 유럽에선 가족 단위 관광객이나 연인들에게 부탁한다.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한테 부탁하면 훔쳐갈 확률이 줄어든다.
젊은 애들 모이는데 직장인이 무슨 토마토 축제를 즐기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활력을 되찾는데 이만한 경험이 없다. 어떤 광고에서 토마토축제 장면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현실에 눈이 멀어 마음까지 뺏기고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람들한테 묻혀서 "와~"라는 한 마디라도 맘껏 소리 질러보고 싶었다. 미친 사람처럼 흥분하고 방방 뛰고도 싶었다. 서른 살이 되어가는 나라도 축제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구아~ 아구아~ 아구아~" 작은 마을의 좁고 기다란 골목을 가득 채운 우리는 토마토를 던져 달라고 난리지만 아파트 주민들한테 물을 뿌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공기도 없는듯한 더운 날 주민들이 뿌려주는 물은 사람들의 열기와 흥분을 더해줬다. 어떤 외국인 남자가 갑자기 날 들어 올려 목마를 태웠다. 더 멀리까지 축제 열기를 구경했으니 난 행운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때 사진은 정말 흔들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소파와 한 몸이 됐구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해질 때면 토마토 축제 속 나를 찾아본다. 벌써 6년 전이지만 방방 뛰어다니며 신나 했던 내 모습이 생생하게 다시금 그려진다. 그리고 다시 힘이 난다. 발렌시아 지방의 작은 마을 부뇰이 나에게 삶의 생기를 다시 불어넣어 준 건 분명하다. 나를 발견한 현장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 아가가 클 동안 자주 보여주고 싶은 사진. 엄마는 어떻게 삶을 이겨내고 헤쳐갔는지 말해주고 싶다.>
아름다운 지중해 해변으로 꼽히는 올루데니즈(Oludeniz Beach)를 찾아 패러글라이딩을 시도했다. 터키의 남서부 해양도시 폐티예로 우연찮게 발걸음 했다지만 액티비티로 도전을 할 줄은 몰랐다. 산티아고까지 900km 넘게 걷고 몸과 마음 모두 지쳤을 때였다.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던지라 여행 다운 여행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만 기다리고 있던 못난 이방인이었다. 같은 숙소에 있던 동행들에 이끌려 높은 곳에 올라 패러글라이딩을 했는데 하늘을 나는 동안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음껏 내려다보며 '나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서 있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40여 일간 고생한 내 발에도 그제야 수고했다는 말을 해줬다. 패러글라이딩 업체 직원들은 DSLR을 들고 타겠다는 나를 걱정했지만 떨어져도 가져갔다고 했다. 그 결정을 아직도 후회 않는다. 하늘을 나는 내내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DSLR 카메라를 높게 들어 올리며 셀카도 찍었다. 까미노를 잘 마무리한 날, 즉 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날이라 특별히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어린 딸아이가 자신감이 없어질 때면 이날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태린아, 너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여행 속 내 얼굴을 볼수록 나라는 사람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꼭 들었다. 내 표정을 보니 진짜 내가 보였다. 진심이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 지도 보였다. 치아도 드러내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만 보이던 나는 언제부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안엔 꽤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 고집스럽게 마음과 몸으로만 기억하려 했던 감정이 더 쉽게 잘 드러났다. 그리고 기억을 못했던 추억도 떠올렸다. 잊어버리려 작정하진 않았지만 애써 찾지도 않은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는 기분이다. 모두 소중한 추억인데 말이다.
어느 날 베네치아 여행 사진을 보고 한참 웃었다. 한 달 동안의 유럽 신혼여행 중 우리는 서로 자주 토라지곤 했는데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삼시 세 끼를 중요시하는 나를 몰라준 신랑한테 몇 시간 삐쳤는데, 평소에도 과자랑 빵만 먹고 배를 채우는 신랑이 뒤늦게 눈치를 채고 리얄또 다리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메뉴를 주문하자마자 난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언제 열이 받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신랑도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사진 속에선 내가 웃고 있지만 실제론 그 전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다들 모를 거다. 다른 사진을 봐도 생각이 난다. 우리가 언제 다퉜는지 내가 언제 또 삐쳤는지 언제까지 말을 안 하고 다녔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예뻤다. 함께 있으면 쉴 틈 없이 내 모습을 담아주는 포토그래퍼 신랑 덕분이다. 작업을 할 때도 사진을 찍고 있어도 신나 미친 척 날뛸 때도 자기 식으로 나를 간직한다. 어디서든 날 지켜봐 주는 내 사람이 있으니 행복하다. 지인들은 사진만 보고도 신랑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줬다. 특히 정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게 느껴진다고 한다.
<신랑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찍어준 사진들. 다른 사람들에겐 사소하지만 우리에겐 각별한 추억 조각들이다. 어쩌다가 모델이 되어간다. (사진 출처: 달달스튜디오)>
주변 사람들은 항상 나를 예쁘고 올곧게 지켜봐 주는데 정작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게을리 여긴 것 같다. 지금까지는 회피하려고 애썼지만 이젠 당당하게 나와 맞서고 싶다. 바라보고 싶다. 어디서든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고 싶다. 나의 소울 여행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