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장애인'말고, '선량한 시민'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 맺음

by 김우진



처음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알게 된 것은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의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라는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그 후 그의 '어른이 되면'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보게 되었고 장애인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그동안의 생각이 무색하게 '탈시설'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내 삶을 하루하루 버텨내기에 급급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읽게 되었다.

참 오랜 시간 망각했던 문제를 환기시킬 수 있었던 책.





홍은전의 '그냥, 사람'을 읽으며 몇 번이나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던 것처럼 이 책도 한 번씩 숨을 고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들을 애써 지워가야 읽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장애 당사자는 물론이고 곁에서 함께했던 활동가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쟁하고 버틸 수 있는 것인지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가늠이 안되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탈시설 권리의 핵심인 주거권을 주장하며 주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활동 지원 서비스 강화를 위해 투쟁하던 그들의 목소리는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의 정당성에 공감하고 시설의 삶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에 대해 책을 읽는 내내 분노하면서도 시설을 벗어난 장애인의 삶이 과연 안전하고 더 나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이 결국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방식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누군가를 '장애인'으로 보는 인식 그 자체거든요. 장애인이 안전하게 보호받으려면 옳게 판단할 수 있는 비장애인의 테두리 안에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비장애인이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거든요. p.118


그렇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을 돌이켜보더라도 비합리적이고 우매한 판단들은 아주 빈번히 점철되어 있어서 어디 가서 말도 꺼내지 못할 지경이다.


그런데 왜 나는 장애인이 사회에 나와 사는 것을 지레 안될 것부터 생각했을까. 비장애인도 잘 못하는 것들(관계 맺음, 건강관리 등)을 장애인이라고 기회조차 주지 않거나 그럴 권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부터 비극은 시작된 게 아닐까.





정상인은 낙인을 포용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낙인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p.123


책 속에서 만난 거주인(지금은 자립한)들이 탈시설 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의사표현을 늘려가고 어떠한 사안에 대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수동적 존재로서 지시만 받던 인간관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시설 후 자율성과 주체성을 가지게 된 그들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어나가며 행복감을 느꼈던 이유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의 인권을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시혜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할 때면 곧바로 장애인에 대한 배제와 적개심을 드러낸다.


전장연의 아침 출근길 시위에서 보았던 시민들의 반응이 그렇다. '감사한 줄 알라'는 전제를 깔고 '선량한'시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존재로 장애인을 곧바로 전락시킨다. 그들이 겪은 '평생'의 불편보다 자신이 겪은 '며칠'의 불편 때문에 그들은 장애인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결국 그들은 '착한 장애인', '감사해하는 장애인'에게는 온정을 베푸는 시민이지만 자기 권리를 내세우는 장애인 앞에서는 무차별하게 그 존엄을 짓밟는 무자비한 시민이 된다.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 믿지 않는 것이다.





프리웰 초대 이사장이었던 사회복지 연구자 박숙경은 "고통을 누군가가 알아보는 것에서 대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함께하는 게 소통의 과정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명색이 '선량한' 시민이라면 장애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노력부터 했어야 한다. 맹자의 성선설에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한 발 양보해 정말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있다한들 그 양심을 갈고닦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성선설도 성악설도 성무선악설도 모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부당함을 공감하려 노력하고, 작은 행동일지라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한에서 '선량한' 시민이라고 말해져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장애인에게도 모욕을 퍼붓는 그들이 과연 시설의 장애인들에게, 탈시설한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살아갈 리 만무하다.


탈시설 후 사회로 돌아온 그들의 삶은 정당하기에 당연히 모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시설을 벗어나 사회로 돌아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주할 공간뿐만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자율성이다.


탈시설 정책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장애인이 시설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시설 문화에서 벗어나 자기 삶에 대한 권한을 되찾는 거예요. p.100




이 글을 발행하기 며칠 전인 8월 24일, 대구에서 30대 엄마가 자폐성향을 가진 두 살배기 아들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책 해제에 "돌봄이 형벌이 된 사회에서 장애는 죄가 되었다. 시설은 '감옥'이지만 탈시설은 '사형'이 되는 사회는 누군가의 불안과 죄책감을 연료로 삼았다."라는 전근배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지역사회는 향유의 집에 살던 시민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시설로 보내진 이들이 아니라 이들을 시설로 보낸 이들, 시설을 유지해온 이들이 먼저 변할 때 탈시설은 가능하다. p.343


장애인의 돌봄이 가족으로 시작해 시설로 끝나는 일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가족에게 무거운 짐을 씌우고 책임을 방기 하는 사회 구조가 변화해야 한다. 시민들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것이 많은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가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시위와 투쟁을 이어가는 이유이다. 그 투쟁에 동참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외침이 무엇인지, 왜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X 인권기록센터 사이 기획ㆍ기록, 홍은전, 홍세미, 이호연, 이정하, 박희정, 강곤 글, 오월의 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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