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진 Jan 11. 2024

[문장] 축복을 비는 마음(김혜진)

마음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제목을 보고 누군가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에

새해 첫 책으로 무작정 읽은 김혜진의 소설.


집과 관련된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재개발 대상의 건물이나 임대아파트, 좁고 낡은 집의 세입자, 건물주, 청소노동자의 이야기가 세대를 넘나들며 흐른다.


엄마와 딸, 친구, 할머니와 손녀, 사랑하는 연인,

직장 동료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단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처지를 모른 척하지 않는다.

그것이 교양이라 생각해서든, 시혜의 마음이든

때로는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는 가느다란 마음이든.


불행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은 가능하고, 연민과 동정이 오간다. '공간'이 한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절망적이고 우울하지만 끝내 버리지 못하는 희망은 결국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책 제목인『축복을 비는 마음』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 소설은 「산무동 320-1번지」였다.  이 한 문장 때문에.

 "호수가 보잖아요."

집주인 대신에 밀린 월세를 받으러 다니던 부부가 모진 말보다 기다림으로 겨우 5만 원을 받아 나오던 중

아내가 다시 돌아가 3만 원을 부의금이라고 돌려준다.

타박하는 남편에게 반려견 호수가 보고 있다고 아내가 말하는 장면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염치를 가진 한 인간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 인간다움이란 것은 결국 상대방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는 것이 아닐까.





남기고 싶은 문장들


「미애」
p.16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에겐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지켜나갈 여유가 있었다.

p.18 모든 게 지나치게 정답 같은 질문들과 대답들. 옳은 것이 분명한 이야기들. 좋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가치들. 당연히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조차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사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문장들.



「자전거와 세계」

p.189 퇴근길에 그녀는 오늘만큼 힘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요일은 더 힘들고, 수요일은 더욱더. 목요일, 금요일은 말도 못 하게 힘들다. 그것이 다만 육체적인 피로 때문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안다. 그녀는 점점 센 강도로 훼손되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걸을 때, 어두운 방에 누워 잠을 청할 때,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쉴 때, 그녀는 들을 수 있다 마음에 금이 가고, 갈라지는 소리를. 마음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p.204 일단은 멈추지 말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사소한 장애물에 주의를 뺏기지 않고, 겁내지 않고, 못 본 척 앞만 보고 달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자전거 타기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면, 그러면 정말,
갈라지고 무너져 내린 마음이 온전해질까.



「사랑하는 미래」

p.217 연애가 시작된다. 갑작스럽고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녀는 이런 상황을 준비한 듯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놀란다. 서로의 역사와 서사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말하고 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 두 사람은 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들었던 이야기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열중해서 는다. 그들은 지치지 않는다. 서로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항상 깨어 있는 상태다.


p. 220 두 사람에게 서로의 말은 정확한 의미로 가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복잡한 속내와 중첩되는 의미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하고 단일하다. 거기엔 불필요한 왜곡도, 치명적인 오해도 없다. 진지하고 심각한 대화를 나눌 때, 두 사람의 상상력은 빛을 발한다.

때로는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 기억의 자리(나희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