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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Feb 14. 2024

[문장] 이것도 제 삶입니다

몸은 한 인간의 역사물이다


『생리공감』을 쓰고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만든 김보람 감독이 작년에 섭식장애를 가진 딸과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라는 다큐를 선보였다.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던 박채영 씨가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


섭식장애로 불리는 폭식증이나 거식증에 대해서는 다이어트와 관련된 증상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훨씬 더 다양한 층위의 원인과 개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영은 어린 시절 겪었던 외로움이나 고립감,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러면서도 자신이 몸의 주체가 되고 싶었던 욕구가 뒤엉켜 거식증을 앓게 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자신의 몸이라 생각해 하루 일과와 먹는 양을 강박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했던 모습,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에 먹기 싫어도 참고 먹어야 했던 모습, 병원 치료에 지치고 슬픔에 파묻혀 무너져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계속해서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꾸준히 기록하고 사유하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 눈에 '비정상'적인 삶으로 보이길 거부하고 자신만의 경험과 언어로 충분히 '온전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채영의 모습이 더 진한 기억으로 남는다.


'앓는 삶' 자체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채영은 거식증을 치료해 가는 과정을 겪으며 '정상'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목표보다는 개개인의 욕구와 상태에 집중하는 치료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더불어 '질병권', '잘 아플 권리', '아프면서 노동할 권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지점이 많았다.


특히, 채영과 어머니의 관계가 채영의 몸과 마음에 남긴 기억과 현상들을 지켜보며, 또한 채영의 어머니가 특정한 행동양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유년의 경험들을 지켜보며 한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요인들 중 '어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어른이 꼭 가족이 아닐 수도 있으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어른들의 영향이 나와 내 다음 세대에 까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어른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서는 채영과 어머니의 관계성이 더 드러난다고 하니 영상으로도 이 이야기를 접해보고 싶어졌다.


덧붙여,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몇 해전부터 여성의 몸에 대한 담론은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모든 미디어에서는 사회가 만들어낸 미의 기준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소비를 부추겨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우리 사회가 획일적으로 정해 놓은 몸에 대한 기준을 따르는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자기 관리의 핵심 영역이 된 지 오래다. 그 기준에 맞지 않는 몸은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고,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 게으름의 지표로까지 여겨지며 몸을 개인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조절할 있다는 분위기도 팽배하다. 작년에는 체중이 늘어난 모습으로 컴백한 한 가수가 네티즌들로부터 연예인으로서 자기 관리를 못한다는 비난을 받고 자신의 폭식증을 밝힌 일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식생활과 운동량을 단순히 개인의 의사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치부할 있을까? 사람의 일상은 직업, 성별, 가족관계, 여유시간, 경제적 지위 등에 따라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고, 또 그러한 차이들로 인해 저마다 다른 심리 상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작 순전한 본인만의 선택이나 자유의지로 자신의 몸을 관리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스턴트를 많이 섭취할 수밖에 없거나, 끼니를 번에 몰아서 먹어야 하거나, 운동할 시간과 체력이 없는 경우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몸을 관리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네가 게을러서'라고 개인을 탓하것은 이전에 해결되어야 빈부격차, 노동 문제, 외모에 대한 젠더 규범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몸이 어떤 모양인지를 바라보기보다 몸이 보여주는 변화의 소리에 주목하는 것이 나의 몸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자 타인의 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몸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그 사람의 삶 자체를 평가하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이야 말로 우선되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짐작과 다르고
짐작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해서
고유하게 근사하다.

                              『나는 동물』, 홍은전





남기고 싶은 문장들


p.93

  모든 인간에겐 자신만의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은 온 세상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에는 한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딛고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돌보고 회복을 기다리는 것. 실패에 기회를 주고 곁을 지키며 온기를 나누는 일. 거기에 우리가 이 땅에 모여 사는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는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무심코 지은 미소 한 번이 그의 하루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크고 묵직한 선물이나 관심보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온정들이 방황하는 나를 지켜주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간이,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p.121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하고 굳어버린 감정을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 그게 무기력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온몸을 짓누르는 감정 덩어리를 견뎌내야 하는 것. 감정이 향해야 할 대상은 잃어버린 채 홀로 감정을 씹고 삼키고 뱉기를 반복하는 것. 소화되지 못한 감정으로 범벅된 엄마의 몸에 안기면 슬픔이 몰려왔다. 슬픔에 묻혀 사랑을 말할 수가 없었다.


p.184

  내가 알지 못했을 뿐, 언제나 거친 폭력의 땅에는 연대의 손이 닿았고 불평등과 불공정의 구조 앞엔 그에 맞서는 목소리가 있었다. 변화의 시작과 끝엔 항상 사람이 있었다. 점수로 평가되던 공부는 외롭게 나와 싸우는 시간이었다면, 현장과 사람들 속에서 얻은 배움은 '나'를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연결시켰다.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감각은 처음으로 나의 '영향력'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로 주변에 영향력을 지닌다. 영향력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진 '몫'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영향력을 고민한다는 건, 한국사회의 시민으로서 내가 가진 책임, 의무, 욕망을 고민해야 함을 뜻한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사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겁나고 낯설었다. 내겐 좋은 영향을 끼칠 만한 자격이나 내실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설렜다. 잠재된 나의 능동성이 꿈틀댔다. 한때 나의 자존감은 높은 점수와 좋은 평가에서 솟아났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완벽한 결과를 내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만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나라는 존재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민'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난 이미 그 자체로 영향력이 있고 목소리에 힘이 있고 의미 있는 존재였다.

    

p.216~217

  아마 누군가는 내게 묻고 싶을 것이다. 폭식과 구토를 하면서, 알코올 의존증을 가진 채로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고. 그럼 나는 되물을 것이다. 정상적인 삶이 무엇이냐고. 폭식과 구토 증상이 있어도 친구를 만나고 공부하고 영화를 보고 생계 활동을 하고 연애하고 반려동물과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이것은 왜 정상적인 삶이 아니냐고 말이다. 당신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상적'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사람은 타고난 몸, 직장, 습관, 성향에 따라 삶의 형태가 달라진다. 거기에 정상/비정상은 없다. 그러나 질병을 갖게 되는 순간 한 개인의 삶은 쉽게 비정상으로 평가된다. '나는 비정상이다'라는 인식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자신의 욕구를 불신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모방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삶에서 소외된다.     


p.218

  만약 이랬다면 어땠을까? 환자와 의사가 함께 논의해 먹는 양의 목표를 설정한다. 환자는 자신의 목표를 갖고 식사 연습을 한다. 위험 체중 상태인 경우를 제외하고 체중은 치료에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 환자는 식사를 할 때 칼로리나 체중 증가를 신경 쓰는 대신 자신의 식욕과 배부름을 느끼는 것에 집중하도록 연습한다. 안전한 환경에서 다양한 음식 먹기를 도전한다. 의사는 환자의 몸무게나 먹는 양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감정과 개인의 욕구, 정서에 집중하며 치료를 진행한다. 지금의 병원처럼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변수가 통제되는 공간이 아니라 안전하게 변수를 경험하는 장소인 입원 환경을 조성한다. 그렇게 섭식장애로부터 목숨을 보호하고 증상을 갖고도 일상을 유지하는 법을 체득하는 것을 입원 치료의 목표로 삼는다.

  입원 생활과 사회생활 사이의 간극이 좀 더 작았더라면 혼란과 불안이 조급 덜하지 않았을까? 먹는 양을 늘리거나 체중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는 대신 음식 앞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변해가는 욕구들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나에게 필요했던 건 '정상성'을 찾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몸은 없으며 이상적 몸도 없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내가 찾고 싶었던 건 과거의 내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나의 삶이었다. 병원은 그런 욕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p.221

우리는 쉽게 몸을 ‘극복’ 해야 할 대상으로 논하곤 한다. 인간의 영원한 방해물인 듯 통제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식증을 심하게 앓았던 시기의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폭식과 구토의 경험, 우울증 증상을 겪고 몸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는 시간을 통해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몸은 말한다. 내가 나의 기분과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고 있을 때 통증으로, 불편감으로, 경직으로, 나를 바라보라고 알려준다. 몸은 기억한다. 머리가 무시하거나 망각해 버린 감정과 기억이 몸에는 전부 담겨 있다. 그러므로 몸은 한 인간의 역사물이다.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하고 들여다봐야 할, 존중되어야 할 삶의 일부이다.     


p.223

  나의 꿈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다. 미래에 아플 몸과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질병, 위험에 몰두하느라 현재를 잃지 않는 것이다. 나의 목표는 섭식장애를 앓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병을 미워하기보다 병과 조화를 이룬 삶을 꾸려가고 싶다. 섭식장애를 겪으며 얻게 된 질병과 상혼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목표하던 일을 성취하고 일터에서 친구들 속에서 잘 지내는 것이 내 삶에 중요한 것만큼 섭식장애를 앓는 삶, 질병에 노출된 삶도 미뤄둘 수 없는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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