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진 Mar 08. 2024

[문장] 아무튼, 당근마켓(이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이훤 작가를 알게 된 건 당사자분께는 미안하지만 순전히 이슬아 작가 때문이다. 이슬아 작가가 이훤 작가의 스튜디오를 소개한 글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 뒤 서울국제도서전의 헤엄출판사 부스를 방문했을 때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막연하게 두 분이 연인이신가 하는 생각은 했지만 이슬아 작가를 직접 만난다는 설렘으로 그 생각도 곧 잊혔다.(두 분이 연인 같다고 한 내 말을 믿지 않던 지인이 이슬아의 끝내주는 인생을 읽고 나서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고 놀라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작년 'YES24 X 올해의 젊은 작가 이슬아' 『끝내주는 인생』 북콘서트에 갔을 때 진행을 맡은 이훤 작가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느리게 말할 때의 표정, 상대와 대화를 나눌 때의 분위기, 차분하고 담담하지만 분명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모습에서 신중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밴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슬아의 연인 이훤이 아닌 사람 이훤을 보았다.


두 분이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는 다소 충격을 받았지만(결혼제도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에 대해) 내가 직접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결혼을 그토록 축하한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긴 결혼식 영상을 끝까지 다 볼 정도로.


그래서 이훤 작가가 아무튼 시리즈를 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읽었고 사려 깊고 따뜻하고 섬세한 작가의 생각삶의 지향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된 일,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한 진지하고도 순수한 욕심, 쓰는 것의 소중함을 알고 꾸준히 쓰는 성실한 자세, 동네주민들의 훈훈한 사연에 같이 감동하는 말랑한 마음까지 얇은 책에서 깊은 인간성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직 의 본업인 시인으로서의 작품 『양눈잡이』를 읽지 못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남기고 싶은 문장


p.32

  그의 낭독회는 외진 곳에 자리한 작은 서점에서 예정되었고 모객 기간이 길지 않았다. 정원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두 명이라니. 그의 시집을 아끼고 좋아해 여러 사람에게 선물한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어쩌면 나 스스로를 향하던 어느 날의 번뇌를 거기서 보아버렸는지도.

  자신의 세계를 움직여 먼 곳까지 외준 한 사람 한 사람을 환대하는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시장의 수요보다 백 배만큼 내어줄 준비가 된 시인이. 실로 그는 웃으며 낭독회를 잘했을 것이다. 그것은 시장이 기억하지 않을 공급 방식이었다.

  이후에도 그날의 대화를 자주 생각한다. 삶 앞에서 꼿꼿한 고개를, 스스로의 일을 존중해 주고 자신을 작게 만들지 않는 자세까지 전부.     

막연하게 시인을 동경해 오던 오랜 시간 동안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시장이 기억하지 않을 공급 방식'으로 시를 쓰고 낭독할 수많은 시인들에게 경외의 마음을 보낸다.



p.33

  시는 읽힐 때 확장된다. 독자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주소로 간다. 독자는 만난 적 없는 시인 때문에 어딘가 낯설어진다. 같은 시가 자신이 통과한 타인의 수만큼 다시 태어난다.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팽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시를 썼을 거다. 시인이 자전적으로 쓰지 않아도 그 경험이 스스로를 잘 옮기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몰랐던 이름의 인물을 데리고 엉뚱한 곳에 다녀와도, 투과하며 남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쓰면서만 갈 수 있는 세상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쓰면서만 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읽기만을 선호하는 나에게 조금씩이라도 쓰고 싶은 동력이 되어준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은 책과 그가 쓴 글이다."
 -도스토예프스키


p.44

  사람을 찾던 시절에 꼭 맞는 비유다. 나와 어울리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돌출된 나와 움푹한 자신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이후에도 나와 타인은 동시에 탐구되었다. 끄트머리와 끄트머리를 일일이 맞대보는 시간.

p.50

  이름을 모르고 만났지만 어떤 정체성은 들킬 수밖에 없다. 말과 태도는 그 사람의 지문 같아서 잘 감춰지지 않는다 다행스럽고 무서운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건.

타국에서 오랜 시간 지내면서 고립감과 위태로움을 안은 채, 사진을 찍고 글을 쓰던 사람 이훤. 이중언어의 감각 속에서 고국과 타국을 끊임없이 살펴야 했던 양눈잡이 이훤. 그런 그의 깊은 사고와 섬세하고 다정한 정체성도 그의 말투와 손짓과 표정에서 들킬 수밖에 없는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