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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May 01. 2024

[문장] 520번의 금요일(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우리는 4:16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책을 읽고 오셔도 좋고요, 아직 읽지 못하셨거나 읽을 엄두가 안 나는 분 매우 환영합니다!
제가 읽어줄게요.


이 다정한 말의 주인공은 내가 잠시 인권활동가를 꿈꾸게 만들었던 홍은전 작가님이다. 작가님의 『그냥, 사람』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책장을 덮을 때가 여러 번이었는데 그럼에도 또다시 그 책장을 열고 마지막까지 읽으며 작가님의 세상을 감히 동경하게 되었다. 아니 그 언저리 어디에서라도 작가님과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를 꿈꾸던 시간들이 있었다. 생계형 직장인이기 때문에 꿈은 꿈으로 끝났지만, 작가님의 글을 찾아 읽고 책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일은 중요한 일정이 되었고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 『전사들의 노래』, 『나는 동물』을 누군가와 때로는 혼자 읽으며 내 사고방식과 삶의 지형을 확장시켜 왔다.


작가님의 SNS를 통해 세월호 관련 기록작업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기다리던 책이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되었다. 바로 『520번의 금요일』이다.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를 함께 구매해 틈나는 대로 읽어 오던 차에『520번의 금요일』 북토크에 갈 기회가 생겼고, 책을 다 읽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작가님이 읽어주신다는 다정한 말에 홀려 뜻깊은 시간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장에 들어서자 참여 인원이 너무 적어 당황하며 두리번거리는데 낮에 참석하신 행사에서 달아준 나비 모형을 어깨에 달고 앉아 계시는 작가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 어떤 말씀을 듣게 될까, 작가님에게 세월호 기록작업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또 이렇게 쉽고 우아한 자리에만 오고 세월호 가족분들 옆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구나 하는 복잡한 심경으로 자리에 앉았다.


작가님께서 재난피해자관리센터에서 전시회 해설을 맡게 되신 날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전시회를 찾아와서 긴장하고 걱정하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직 어린 학생들, 팽목의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셨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시간이 오래 흘러 사건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로 전달해주어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기록이 중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작가님이 예고하셨던 대로 책의 구절들을 직접 읽어주시며 그에 대해 하셨던 생각이나, 유가족분들과의 기억을 꺼내놓으셨는데 덤덤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왠지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표현할 수 있기까지 작가님의 내면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가고 감정을 다스리셔야 했을까 싶어서. 그동안 작가님 책을 읽을 때, 글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글뿐만 아니라 말씀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도록 하신다고 느꼈던 순간이다. 덕분에 유가족분들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매 순간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시던 작가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이 책을 읽으면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변한 것도 많다고, 살아낸 그 시간이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살고, 싸우게 한 것은 사람들의 에너지, 시민들의 연대하는 힘이라고 하시던 말씀까지. 나의 작고 작은 에너지와 연대의 마음을 이리저리 전하며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신 작가님께 늘 감사하다.




남기고 싶은 문장


p.236

혼자였다면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 잃은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때는 진짜 목숨 걸고 싸웠어요. 할 게 그거밖에 없었으니까. 우리가 함께라는 사실,

우리 어깨 위에 모든 가족, 모든 아이가 업혀 있다는 책임감으로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았죠. (수인 엄마 김명임)


p.243~244

그 과정이 정말 버거웠어요.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과거에 살았던 것처럼 지내면 편안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성이가 '엄마, 그렇게만 살지 마, 엄마도 일어나서 사람답게 살아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처럼 옛날의 제도에 눌리고 부모의 가르침에 눌리고 주위 환경에 눌려서 그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죠. 근데 이제 그 억압을 떨치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숨을 쉬어도 '살살' 쉬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런 나에게 갑자기 너무 큰 부담이 몰려왔어요. 카메라 잡고 있는 것도,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도망치지 않았어요. 나는 달라져야 했어요. (지성 엄마 안명미)


p.245

참사 발생 206일째 되던 2014년 11월 7일 마침내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비록 수사권과 기소권은 빠졌지만 상시 특검을 하고 유가족이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인사는 배제한다는 내용에 합의한 것이다. 한국사회에 유례없는 대중적 입법 운동의 성공이었다. 이로써 재난참사에 대한 최초의 독립적 조사기구가 만들어졌다. 재난참사가 일어났을 때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건 이전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었다. 과거에 는 참사가 일어나면 처음에만 반짝 사회적 관심이 일다가 경찰이나 검찰이 대충 꼬리 자르기를 했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미완으로 끝났고 유가족들만 억울해하며 속이 타들어갔다 사회운동에서도 참사의 진상규명을 '운동'의 영역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세월호참사는 재난참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p.255~256

세상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적당히 눈감고 외면해도 충분히 선량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큰 권력인지 모르는 이들이 무심하게 뱉는 말들이 칼이 되어 피해자들을 찔렀다. 억울하고 비참해서 매일 도망치고 싶었지만 가족들은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으려고 분투했다. 어떤 진실은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으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준영 엄마가 노란 리본을 붙이며 '나는 세월 호 엄마야'라고 주문을 외는 일은 예전의 내 자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우리는 4:16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외쳤던 바로 그 구호의 뼈아픈 실천이었다. 세월호 가족이 계속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자신이 살아왔던 자리가 가해자(공범)의 자리였고 다시는 거기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사회를 아래로부터 뒤흔들었던 세월호운동은 그 운동의 주체들 안에서 매일매일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p.410

그간 가족협의회 부모들로부터 연대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고 그 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현장을 보지 않고 나는 어떻게 그 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연대'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소리로 표현한다면 바로 4∙16합창단의 연습실일 것이다. 그 무수하고 평범한 밤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놓을 것 같은 어떤 강력한 힘이 그 밤에 있었다.


p.418

'시민상주'라는 말이 낯설다. 2014년 6월 광주에서 마을촛불 모임을 하던 사람들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모였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전통을 살려 '3년 상'을 함께 치르는 자세로 살자는 '시민상주모임'을 제안했다 상주가 될 자격이 특별히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책임과 결단을 품은 자라면 누구든 상주가 될 수 있었다. 기존 시민단체나 조직적 활동과는 형태가 달랐다. 시민 개개인과 마을 촛불모임이 중심이 되고, 특별한 조직체계 없이 SNS를 통해 활동을 제안하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며 결정 사항들은 개인의 자발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이른바 새로운 형식의 시민활동 플랫폼이다.


p.420

광주시민상주모임에 대해 취재할 때 다른 단체들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활동이 아주 다정하고 섬세하다는 점에서 그랬다. 10년 동안 이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정인선 씨를 인터뷰하러 가면서 그가 참사 이전에도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일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민상주모임의 활동이 정형화되지 않고 다채로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체화한 이들이었다. 5.18 때 시민군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었던 그들의 부모는 이후에도 데모하던 대학생들이 피신해 숨어들면 가게 셔터를 내리고 보호해 주었다. 그런 부모 아래 총탄 자국 선명한 거리를 통과해 학교를 다녔던 유년 시절, 친구들끼리 돌려보았던 5.18 비디오테이프에서 본 참상, 5월이면 금남로에 전시되었던 처참한 사진들, 광주 전체가 5:18을 기억하면서 보낸 세월이 무려 43년이었다. 광주시민들의 핏속에 흐르는 그 무엇이 그들을 4.16과 굳건히 연결했다.


p.428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가고 나서부터 세월호운동이 나의 운동이 된 것 같아요. '돌봄'이라는 단어에 푹 빠졌어요. 죽고 싶었던 시간을 통과해 결국에는 자신을 돌보는 게 이 우주를 돌보는 것이고 우주를 돌보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것임을 알아차렸어요. 세월호참사라는 거대한 아픔을 거치기 위한 통과의례였던 것 같아요. 4.16정신의 핵심은 환대와 연결이라는 마음이에요. 평가, 판단, 분석 없이 온전히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것이 가장 안전한 사회죠. 세월호 관련 회의를 할 때면 모두 일어나서 별이 된 아이들을 기억하는 묵념을 하는데, 저는 조금 달라요. 누군가를 위해 묵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할 '나'를 위한 침묵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김은호)


p.432~433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힘센 사람과 약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으로 우위가 나뉜 세상에서 생명과 존중, 평등과 평화가 우선시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고난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에서 괴물을 만나기도 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의 간사한 계략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니 나를 성찰하고 함께 힘을 합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마땅히 그러해야 할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 세월호참사로 본다면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벌받는 세상, 아픔을 겪은 피해자들이 위로받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다.


p.438~439

"유가족들이 아픔의 상처를 딛고 굳건히 일어설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고 참된 나눔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30분간의 기도가 끝나자 부부는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미처 그들 삶의 이력도 묻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그들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10년이란 시간이 꼭 100년처럼 아득하게 멀어 보이기도 하고 옛날이야기처럼 허무맹랑하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바로 전설 속에 나오는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인가 했다. 부부는 아주 쉬운 말만 썼으나 나는 그들의 말이 어렵게 느껴졌다. 유가족들의 모습에 '마음이 짠해서' 왕복 두 시간의 운전이 너무 무서웠음에도 10년간 버텼는데, 그건 모두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했다. 종교가 없는 나로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분명히 알게 된 건, 세월호운동엔 내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일반의 언어나 숫자로 집계될 수도 없는 이런 이야기가 아주 많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살게 했고 싸우게 했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했다. 부부는 오늘도 12시면 팽목성당에 도착해 성당 내부를 깨끗이 청소한 뒤 문을 활짝 열고 2시면 어김없이 기도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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