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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Aug 24. 2021

나 지금 방긋할 기분 아니야

당근 거래하는 엄마들 힘내십시오




첫째 아이와 갈등이 심하던 올봄, 한참 아이를 훈육하고 있는데(말이 훈육이지 사실 아이를 혼내는 상황이었지만) 휴대폰에서 "당근"하는 알림이 울렸다. 자못 심각한 분위기였던지라 알림을 무시하고 아이와 말을 이어나가는데 연달아 "당근", "당근" 하는 것이 아닌가.


대화에 방해가 돼서 휴대폰을 가지러 갈 찰나, 딸아이가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나 지금 방긋할 기분 아니야!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면서 딸아이가 너무 귀여워 꼭 안아주느라 심각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그날 뒤로도 "당근" 하고 울리는 알림 소리를 들을 때마다 딸아이가 생각나 혼자 웃은 적이 많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잠깐만 쓰면 되는 물건들이 상당히 많다. 장난감부터 옷, 의자, 책 등 오래 쓸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첫째 아이 때부터 중고 물품을 애용했다. 그때는 지역 카페나 중고나라에서 주로 거래를 했는데 둘째 아이 때부터는 당근 마켓을 이용한다.


돈을 받고 팔기 애매한 것들은 무료 나눔 하였고 돈을 받고 팔 때에는 적정한 가격을 정하고 최대한 깨끗하게 처리하여 판매하였다. 중고라 할지라도 구매한 사람이 받고 기분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당근 이용자 간의 약속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까지 총 20번가량 거래가 있었고 서로 매너를 지키며 물건을 주고받았다. 코로나 시국이라 비대면 거래(문고리 거래라고도 한다)도 많았지만 기분 상하거나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어느 날 친구가 웃긴 영상이라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https://youtu.be/jxdQh7vs4Ls


아마 이 영상을 본 분들이 이미 많을 것 같다. 조회수가 48만 회를 넘었으니까. 예전에도 남편들이 뭘 주고받는지 모르는 채로 거래하는 이야기가 유머처럼 회자됐었는데 아마 영상으로 같은 상황을 만든 것 같았다. 초반부에는 상황이나 연기자들의 표정이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웃기기 위해 만들었을 영상이겠지만,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희화화되고 있는 인물은 수화기 너머의 아이 엄마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엄마들이 남편들에게 지시하는 대화 내용들은 자연스럽게 진상 고객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남편들에게 밤늦게 심부름을 시키고 남편을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하는 배우자로 묘사된다.


나는 우선 내용이 너무 과장되어 아이 엄마들이 진상처럼 보이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 이전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남편들은 무슨 거래를 하는지 모르고 나오는가?' '왜 거래를 주로 남편들이 하게 되었는가?'


아이의 성장 과정에 따라 무슨 물건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엄마가 대부분이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서 만 3세까지는 자잘한 육아용품들을 짧은 기간만 쓰게 되기 때문에 거래할 일이 많다.


영유아 돌봄의 역할이 엄마에게 치중되어있는 지금 사회 분위기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생각해 찾고 고르는 것은 엄마의 몫이다. 여러 물건들의 상태나 가격, 구매 거리 등을 고민해서 거래자를 선정하고 약속 시간이나 장소도 정해야 한다.


그럼 왜 정작 그렇게 공들여놓고 직접 못 나가는가?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 없는 여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는 아이가 있는 가정 대부분이 엄마가 휴직 중이기에 퇴근하는 남편에게 부탁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남편이 거래하러 간 동안 집에서 편하게 쉬는 엄마들이 과연 있을까? 아이 돌보고 저녁 준비하고 끝나지 않는 가사에 시달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영상의 댓글들을 보면 대부분 '대한민국 남편들 짠하다, 남편들 파이팅' 같은 내용들이 많다. 재밌고 웃긴 영상이라고 '좋아요'가 늘어나는 이 영상에는 아이를 기르는 엄마의 고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더불어 아이 물건에 대한 아빠의 무관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빠가 아이의 무슨 물건을 사는지도 모르고 나가는 게  그렇게 웃긴 일이란 말인가? 오히려 아이의 생활이나 아내의 생각에 무관심한 면들을 개선해야 되는 일은 아닐까?





수없이 많은 댓글들을 보다가 남들은 그저 보고 재밌다고 웃는 일에 이런 이야기나 하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영상이 정말 재밌지 않았다.


당근 거래하는 순간만이라도 아이를 두고 외출하고 싶은 엄마들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더 좋은 중고 물건을 고르며 새 물건을 사주지 못하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낄 엄마들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정중하고 신중하게 그리고 심지어 다정하거나 상냥하게 거래 약속을 잡고 정성스럽게 물건을 포장해놓을 엄마들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그래서 영상을 보고 난 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 방긋할 기분 아니야!







사진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isHttpsRedirect=true&permalink=permalink&blogId=daan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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