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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Aug 30. 2021

먼지를 닦다가 눈물을 훔쳤다

자식 걱정의 반만이라도 부모 걱정을 한다면



이 선풍기로 바람을 쐬고 싶어?



더위가 한창이던 여름밤, 엄마 집에 도착해 인사를 나눈 뒤 처음 한 말이다. 선풍기는 겉이며 속이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지낼 거실에 먼지바람이 분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17개월인 둘째는 아직 아무거나 잘 만지고 손가락을 쪽쪽 빨기도 하니 행여나 먼지를 먹을까 걱정이 되었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바로 드라이버를 찾아 나섰다. 선풍기를 분해하고 물세척을 해서 말리고 조립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제야 안심이 됐다. 


그리고 자기 전에 엄마 아빠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나이 들수록 뭐든 깔끔하게 하고 지내시라고, 언니(오빠의 배우자)가 와서 보면 깜짝 놀라서 기겁할 거라고, 잔소리에 잔소리를 거듭했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내 마음 저변에는 내 남편에게도 이런 처갓집 상태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깔려있기도 했다. 정작 남편은 그런 것에 둔감해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다음날 새벽 5시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잠에 취한 나는 7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 뒤로도 두 시간이 더 흐른 9시가 되어서야 엄마 아빠가 나타났다. 고추밭에서 4시간 동안 고추를 따고 오신 것이다.

 

나는 쉬지 않고 일하다가 큰일 난다고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엄마 아빠는 건성으로 알았다고 하시고는 아침을 드시자마자 다시 마당에 나가셨다. 따라 나가 보니 아이들 놀기 좋으라고 평상에 천막까지 구비하여 수영장을 설치하고 계셨다. 신나 하는 아이들과 노느라 잔소리도 먼지도 잠시 잊고 아이들과 한참을 놀았다.


문득 엄마가 어디 가셨나 싶어 밭에 가보니 쪼그려 앉아  풀을 매고 계셨다. 그러다 큰 삽 같은 걸 들고 한 움큼씩 퍼내기도 하셨다. 힘겨워보이는 엄마에게 그만하시라 해도 거의 다 했다는 말만 하실 뿐이었다.


그 뒤로도 수시로 밭에 가서 일을 하시던 엄마는 점심을 드시자마자 손녀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낮잠에 드셨다. 낮잠도 잘 안 주무시고 잠귀도 엄청 밝으셨던 분이 세상모르고 주무셨다. 그렇게 잠든 엄마의 얼굴은 그을리고 주름져있었다.


새벽부터 이어졌던 엄마의 노동을 떠올린다. 집에 들어와 허기진 배를 대충 때우고 기진맥진하듯 누워있는 엄마 등 뒤로 어젯밤 닦아놓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꽤 깔끔한 편이던 엄마가 나이 들어서 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밖에서 내도록 일하고 들어온 노부부에게는 먼지 낀 선풍기를 닦을 시간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한들 아무것도 안 하고 눕고 싶었을 것이다.


왜 선풍기의 먼지조차 닦지 못했는지는 묻지도 않고 내 새끼 입에 먼지 들어갈세라 노부모를 타박했던 내가, 쉬지 않고 일하면 큰 일 난다고 잔소리는 늘어놓으면서 정작 나가서 밭일 거들 생각은 안 했던 내가, 너무나 싫었다.





할머니가 잠들어버리자 심심해진 첫째는 TV를 틀어 달라고 했다. 리모컨을 찾아 집어 들었다가 나는 순간 멈칫했다. TV 리모컨 버튼 사이마다 낀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이었다면 나는 아마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겠지. "이 리모컨으로 TV가 보고 싶어?"


나는 잠든 엄마를 한 번 바라보고 조용히 이쑤시개를 가져와 리모컨 버튼 사이사이의 먼지를 빼서 닦아냈다. 리모컨의 버튼이 그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다. 기능을 알 수 없는 버튼도 있었다. 닦아내는 버튼 수가 늘어날수록 눈물도 자꾸 차올랐다. 


왜 몰랐을까, 왜 내 생각만 했을까,
왜 내 자식 걱정만 했을까.



새벽 밭일 후 출근을 하고 퇴근 후 다시 밭으로 출근하느라 힘든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 살면서 영상통화만 하다 보니 늘 괜찮다고 웃고 계셔서 무심코 안심했던 것 같다.


선풍기나 리모컨뿐만 아니라 거실의 장식장, 안마의자, 창틀, 부엌의 이곳저곳이 엄마 아빠의 바쁘고 지친 일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이후 집에 돌아올 때까지 엄마 아빠가 밭에 가신 틈을 타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냈다. 닦는 김에 내 자식 걱정만 하고 부모 걱정은 덜하고 산 못난 내 마음도 닦아보았다. 그래 봤자 먼지 쌓이는 속도만큼이나 내 마음도 뿌옇게 될 것을 알지만.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엄마의 택배가 또 도착했다. 아무래도 효녀 노릇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와 아이들 챙기느라 금세 엄마의 그을린 얼굴을 자주 잊는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방문 때는 철 모르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조용히 청소를 하고 밭에도 나가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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